(3) 미시 정신분석학사(史) : 프로이트 패러다임
개요
프로이트의 책들이 어려운 이유는 그가 사유의 도약과 단절을 거치며 개념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패러다임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 패러다임에는 프로이트가 만난 환자와 현상들이 있다.
막상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더라도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어 보려고 하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왜냐하면…일단 너무 많거든요. 2차, 3차 저작물을 제외하더라도,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프로이트 전집은 권수로 15권이 넘습니다. 게다가 내용은 하나같이 어렵고, 사진이나 그림 자료는 매우 희박하여, 저서들을 읽다 보면 정신이 약간 아늑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 프로이트를 읽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요소는 그의 이론이나 사상이 끊임없이 변화를 겪었다는 점입니다. ‘초자아’와 ‘무의식’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렇다면 초자아와 무의식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해설이 붙은 3차 저작물쯤이 아니고서는, 프로이트의 책만으로 이 둘을 구별하기란 어렵습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저서는 패러다임으로 읽어야 합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미시사(史), 즉 연대기적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죠. 특히, 똑같은 용어(예를 들어 '자아'나 '충동')라도 패러다임에 따라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먼저 각 패러다임은 어떠한 축을 갖고 있는지 파악한 뒤 프로이트의 논문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각 패러다임의 주요 이론과 개념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을 읽을 때도 한결 편하실 거에요.
미리 밝혀두자면, 이번 글은 『프로이트 패러다임』(맹정현, 위고출판사, 2015)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녹여내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본 도서를 직접 정독하기를 권합니다.
시기: 1895년 ~ 1905년
환자: 안나 O.
문서 : 『히스테리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
제1기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대표적인 논문들도 대부분 무의식의 증거를 찾기 위한 혹은 찾은 후의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 유명한 『꿈의 해석』은 물론, '말실수는 무의식의 증거'라는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주장 또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 등장합니다. 앞선 글에서 썼듯이 프로이트는 이 시기에 히스테리 환자를 통해 어렴풋이 무의식의 존재를 인지했고, 이후 환자들을 치료하며 또는 꿈을 분석하며 의식의 그림자 곧 무의식의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억압'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럼 왜 정신은 억압을 하는 걸까요? 바로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은 2기와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1기에서 아이들은 성욕이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라, 성(性)적인 행동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부모나 친척, 지인들로부터 성적인 행위를 목격하거나 당했을 때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훗날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소급적으로 정신적 외상을 얻게 되고, 이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히스테리와 같은 여러 정신질환이 등장한다는 게 제1기의 주요 이론이죠.
예를 들어 『히스테리 연구』에 등장하는 카타리나라는 환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커서 사촌 언니가 아버지에게 똑같은 행위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자 자신이 당했던 행위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요. 의식에서 억압했던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던) 당시의 기억은 무의식의 방으로 들어갔지만,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인해 카타리나는 일종의 공황장애 증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제1기에 속하는 문헌들은 대개 이런 흐름을 따라갑니다.
1) 환자가 정신질환을 경험한다.
2) 해당 질환의 증상은 억압된 기억과 관련이 깊은데, 억압된 기억은 어린 시절 경험한 성적인 트라우마였다.
3) 그 당시에는 성적인 행위인지 몰랐으나 사후에 성적인 행위임을 알게 되자 정신적 외상을 얻고, 이를 무의식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정신질환이 생겨났다.
1기의 정신분석가는 환자의 증상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린 시절의 외상(무의식으로 억압한 기억)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시기: 1905년 ~1911년
환자: 도라, 한스
문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도라의 히스테리 분석」(1905), 「어린아이의 성이론에 관하여」(1908), 「다섯 살배기 꼬마 한스의 공포증 분석」(1908), 「쥐인간-강박신경증에 관하여」(1909)
제1기에서 프로이트는 환자가 경험한 (성적인 트라우마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추적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분명 성적인 행동이나 행위가 아니었는데 환자는 그것을 성적인 행위였다고 인지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유혹설'에서 '환상설'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됩니다.
먼저 1기의 주요이론인 유혹설이란 이런 겁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나를 (성적으로) 유혹했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났으며 이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증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어린아이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유혹설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정신적 외상이 발생한 게 아니라, 어떠한 사건을 성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내면의 환상이 문제였음을 알게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환상설의 정의이며, 여기서 말하는 내면의 환상은 다름 아닌 '유년기의 성욕'입니다.
유년기의 성욕이라니 조금 이상야릇한가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동'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성욕을 설명하기 위해 충동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도입합니다. 충동이란 신체적인 자극의 대표를 말하는데, 이는 곧 신체의 다양한 표상, 예를 들어 눈이나 입, 항문, 근육 등이 성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 '정상적인', '어른의' 성욕이란 성기의 만족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의 성욕은 이와 대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프로이트는 유아들의 모든 행위, 예를 들어 빠는 행위에 대한 집착이나 대변에 대한 관심, 출산에 대한 호기심 등이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성적 만족을 위해 했던 행위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유년 시절의 성욕은 매우 도착적이고 비정상적이라는 뜻입니다. 이후 성적인 것에 대해 배울 나이가 되면 자신들의 이상 성욕에 대해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껴 이를 억압하는데, 이렇게 억압한 충동이 되돌아올 때 신경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정신질환이 생긴다는 것이 제2기의 주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제2기의 문헌은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1) 환자가 정신질환을 경험한다.
2) 환자는 유아시절 성충동[구강이나 항문 등 성적 기관이 아닌 신체의 다른 표상에 의한 성적 만족]이 있었으나, 자라면서 이를 억압했다.
3) 환자가 유아시절 억압한 성욕이 사춘기를 지나 되돌아오자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정신질환 증상으로 나타났다.
2기의 정신분석가라면 환자를 대할 때 유년기의 성욕이 무엇이었는지, 충동이 고착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내고자 애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경성 기침 증상이라면 구강에 고착되었다고 판단하는 식이죠.
시기: 1911년 ~ 1920년
환자: 슈레버
문서: 「편집증 환자 슈레버: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1911), 「사랑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가치 저하의 보편적 경향에 관하여」(1912), 「나르시시즘 서론」(1914),「무의식에 관하여」(1915), 「애도와 멜랑꼴리」(1917), 「아이가 매를 맞아요(매 맞는 아이; 열린책들)」(1919)
이 시기는 프로이트의 사고가 굉장히 고도화되고 복잡해졌으며 문헌들 또한 폭발적으로 등장한 시기라 요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제2기 패러다임과 구분되는 특징을 중심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제2기까지 충동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자아 충동과 성 충동으로, 자아 충동은 자기 보존을 목적으로, 성 충동(리비도)은 어떤 대상을 통해 쾌락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 둘이 대립하는 것으로 봤는데, 정신증 환자 슈레버의 자서전을 통해 리비도가 자아에게도 투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리비도와 자아 충동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봤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일반적인 정신질환이 리비도가 '대상'에 투입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정신증은 리비도가 '자아'에 몽땅 투입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프로이트는 생각했습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라 일컫었고, 정신증 환자의 사례를 통해 프로이트의 제3기가 시작됩니다.
대상에 리비도가 투입될 때는 대상의 변환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가령 빨 수 있는 것이라면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장난감이든 상관 없었죠. 하지만 자아에 리비도가 투입되면 대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이전 시기까지는 '어디에 리비도가 분배되었나?'가 주요한 논점이었다면, 제3기부터는 '리비도가 자아에 투입되었나, 아니면 대상에 투입되었나?'라는 질적 변환에 관한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별했으며, 사디즘과 마조히즘, 노출증과 관음증의 메커니즘을 밝혀냅니다. 리비도가 대상이 아닌 자아에 투입됨으로써 충동의 태의 변환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도착증을 추구한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이론이라 불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도 이때 등장합니다.
내용이 제법 복잡하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요, 나르시시즘은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에 패러다임 변환은 "리비도(성충동)가 자아에도 투입될 수 있다"를 통해 일어났음을 기억하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문헌들은 워낙 방대하기도 하지만 정신분석 치료에 관한 글보다는 원인, 근본 탐구에 집중하는 글이 많습니다. 대신 3기의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대할 때 이런 식으로 파악하겠죠.
1) 환자가 정신질환을 경험했다.
2) 분석가는 환자의 정신질환이 '신경증'인지 '정신증'인지 구별한다. 이에 따라 리비도가 대상에 투입됐는지, 자아에 투입됐는지 구별한다.
3) 대상에 투입됐다면 전이치료를 통해 치료한다.
시기: 1920년 ~ 1940년
환자: 전쟁 후 PTSD를 호소하는 군인들
문서: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 『자아와 이드』(1923), 『억제, 증상, 불안(억압, 증상, 불안; 열린책들)』(1926)
가장 논쟁적인 시기이며, 심지어 프로이트의 정식 후계자를 자처하는 안나 프로이트마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여 이때의 용어와 개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헌들은 어느 문헌보다도 흥미진진하고 읽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욕망하는 존재다'라니, 무슨 철학개론서의 첫 문장 같지 않나요?
프로이트가 제1기에는 안나 O, 제2기에는 도라와 한스, 제3기에 슈레버를 만났다면, 제4기에는 세계대전을 겪고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호소하는 환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갈등과 정신질환을 살펴보니, 자아 충동이나 성 충동이라는 개념으로는 잘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게 충동의 원칙이라고 생각했는데, 트라우마 환자들은 이상하게도 고통스러운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했거든요.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성기 간 결합을 추구하는 삶의 충동이 아니라 파괴와 죽음을 목표로 하는 죽음의 충동 또한 있지 않을까하고 가정하게 됩니다.
이드(Id) - 자아(Ego) -초자아(Super Ego)의 구분도 여기서 도출되었습니다. 이드는 본능적인 모든 충동의 원천이고 자아는 말 그대로 '나'라고 부르는 심급이며, 마지막으로 초자아는 자아를 때리고 공격하는 심급입니다. 주의해야할 것은 이때의 '자아'는 3기까지의 '자아'와 조금 맥락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초자아에 대립하는 힘, 삶과 생명을 추구하는 '나'의 심급이고, 반대로 초자아는 죽음을 추구하는 '나'의 심급입니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는 삶과 죽음(자아와 초자아)의 대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심리 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살고 싶어서' 즉 자아 충동에 몰두해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죽음 충동을 느끼며 계속해서 자신을 불안 상태나 갈등 상태에 놓이길 원한다는 겁니다.
쾌락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불쾌를 추구하는 존재, 인간. 무엇과 많이 닮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현대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매우 닮았죠. 프로이트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매우 모순적이면서 불안정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만물의 영장이자 생명사슬의 정점에 있던 인간이 그야말로 '인간'의 위치로 되돌아옵니다.
물론 정신분석만이 인간의 위치를 제대로 일깨운 건 아니지만,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사실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모든 걸 아는 존재가 아니며,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찬란한 시작과 달리 세계전쟁의 역사로 점철된 20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에는 '불완전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다시,
정신분석은 ‘불완전한 인간’을 끝없이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여전히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미주]
* 기존에 나와 있는 도서들은 테마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패러다임으로 읽기에는 조금 부적합합니다.
** '유년시절 마트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 아시나요? 실제로 마트에서 잃어버린 적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기억 조작/착각 현상은 결코 특수하거나 희귀한 현상이 아니죠.
*** 우리의 시점에서는 훨씬 도착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프로이트는 오히려 어른의 성욕이 더 제한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아기의 비정상적인(?) 성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성생활은 동물의 성생활에 비해 더 풍족하고 다채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 점이 프로이트 읽기를 난해하게,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앞서 성욕이나 충동에서도 느꼈겠지만, 같은 용어라도 어느 시기에 속하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참고/출처]
맹전현,『프로이트 패러다임』, SFP-위고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