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시 정신분석학사(史) : 프로이트, 융, 아들러
개요
정신분석의 창시자이자 자아심리학의 창시자는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아들러와 융은 각각 개인심리학과 분석심리학이라는 자신만의 학파를 창시했다.
어떤 학문이든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그 학문의 역사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한다면 문학사부터 배우듯이 말이죠. 왜 본격적으로 학문을 공부하기 전 학문의 역사부터 배우는 걸까요? 그 까닭은, 역사는 학문의 '개요'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이 발전해온 경로를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학문의 개념과 연계점, 시사점 등을 파악할 수 있거든요.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려면 우선 정신분석의 역사부터 알아야 합니다. 저는 3편에 걸쳐 '거시 정신분석사'와 '미시 정신분석사'라는 소제목으로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다룰 예정인데요. 1편에서 정신분석학의 탄생을 소개한다면, 2편에서는 각 정신분석학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나머지 작은 갈래들, 이를테면 대상관계학이나 로고테라피 등에 대해서 다룰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3편에서는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사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여러 정신분석학 탄생의 계기이자 정신분석의 삼대장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의 이야기부터 살펴볼까요?
정신분석학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당연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입니다. 1895년, 그는 운명적인 환자를 만나게 되죠. 바로 안나 O*라고 불렸던 여성이었습니다. 신경성 기침과 마비, 청각, 시각 장애등을 호소하는 환자였던 그녀의 치료를 맡은 의사 브로이어는 이를 '히스테리증'으로 진단했고 당시 유행하던 카타르시스(최면 치료)** 요법을 통해 치료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브로이어와 함께 했던 또다른 의사가 바로 프로이트였습니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를 통해 최면 치료 요법을 처음 접했는데요. 이때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 내 그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원인을 설명하자 증상이 완화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남다른 통찰력의 소유자였던 프로이트는 최면 치료에서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합니다. 당시에 사용했던 용어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환자의 무의식, 즉 알지 못하는 앎을 발견한 것이죠. 정신분석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의 학문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갑니다. 프로이트는 주로 히스테리증 환자를 대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나중에는 강박증과 신경증 환자, 나아가 정신증 환자로까지 치료 대상을 확대해 나갑니다.*** 이때쯤 프로이트는 많은 명성을 얻어서 여러 제자가 생겼는데, 그 중에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과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도 있었습니다.
융과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강연회에 참석한 뒤 이내 그의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융은 프로이트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정신분석학을 열렬하게 지지했는데요. 아들러 역시 '빈 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할 정도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1910년대에 즈음하여, 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성충동 이론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라고 하면 ‘성기’, ‘성욕’, ‘충동’ 등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미 그 당시에도 프로이트는 뭔가 야한, 언급하기 꺼림칙한 이름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이야 유아성욕설이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20세기는 '유아는 성욕을 느끼지 않는 순수한 존재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거든요.
결국 아들러가 먼저 반기를 들었습니다. 프로이트는 과거의 성적 체험이 심리병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는데,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성적인 트라우마가 심리 질병을 유발했다는 뜻이었죠. 이에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하며 '열등감'을 강조했는데요.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갖고 살기 마련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신경증이나 강박증 같은 심리 질병이 나타난다는 게 아들러의 주장이었습니다.
'인간 행동의 원인은 과거의 사건이나 경험이 아니라 어떠한 목적 때문이다!'라는 아들러의 주장은 프로이트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이었고, 두 사람은 결국 1912년에 결별합니다. 그리고 아들러는 아들러 자신의 심리학, 곧 '개인심리학'을 탄생시킵니다.
한편, 칼 융의 경우는 아들러보다 좀 더 극적입니다. 프로이트는 융을 아들처럼 여겼고,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하자 융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할 정도였습니다(사실 이 때문에 2인자였던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더욱 반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은 융에게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이론이었고, 두 사람은 이론적 갈등을 반복하다 결국 갈라서고야 맙니다. 1913년부터 융은 이미 자신의 이론을 가리켜 '분석심리학'으로 칭하는 등 프로이트와 거리를 두었으며, 1914년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을 사임함으로써 프로이트와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유명한 정언에는 '배반을 통한 복귀'가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배신하여 헤겔로 복귀하고, 레닌이 마르크스를 배신하여 마르크스로 복귀했듯이, 어떠한 인물/개념/사상을 배신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그것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뜻이죠.
이 점은 정신분석학사에도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아들러와 융은 프로이트를 '배신'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나의 이력서」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그 배신감을 생생하게 드러냈죠. 하지만 정신분석학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 두 제자의 배반은 오히려 정신분석의 지평을 크게 넓혔습니다.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은 '열등감의 극복 = 인간 행동 목적론'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심리치료 이론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교육과 사회 분야에서 접목되었고, '권력욕'에 대한 심리학적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콤플렉스'라는, 훗날의 프로이트도 차용하게 되는 개념을 낳았으며, 집단심리학과 더불어 (요즘 유행하는) MBTI 및 심리검사 이론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배반을 통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지평을 넓히고 더불어 그에게 복귀한 것이죠.
정신분석학사(史)가 가르쳐주는 또다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정신분석학이 가진 '가능성'입니다. 정체된 학문이 아니라는 거죠. 뒤이어 소개하겠지만, 프로이트만 해도 적어도 4번 이상 자신의 패러다임을 전환했습니다. 또, 프로이트를 잇거나 배반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정신분석학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고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경주를 따라가다 보면, 도대체 이 학문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료 행위에서 시작한 학문이, 심리학과 철학, 문학, 사회학, 예술에까지 그 줄기를 뻗치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곧 '나 자신'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 모두 주장하는 바는 달랐지만, 그들의 심리 치료의 목적은 같았습니다. 진정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과거의 사건 탓에, 열등감 때문에, 집단 무의식의 영향으로 밉디 미운 '나 자신'을 말이죠. 앞서 저는 정신분석학이 '나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썼습니다. 저는 어떤 정신분석학자를 택하든, 다시 말해 분석심리학을 택하든, 자아심리학을 택하든 결론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당신이 정신분석학을 통해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주]
* 안나 O는 『히스테리 연구』에서 쓰인 가칭으로, 본명은 베르타 파펜하임이었습니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의 치료 이후, 사회개혁가이자 여성 운동인권가로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 최면을 통해 환자가 억누르고 있던 정신적 활동을 자유로이 하게 함으로써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요법을 말합니다.
*** 프로이트가 만난 환자들을 프로이트의 이론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는 프로이트 이론의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3편에서 설명하겠습니다.
**** '나'는 리비도에 의해 성 충동과 죽음 충동을 동시에 느끼는 존재이자 집단 무의식과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존재이고, 열등감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자기 완성에 몰두하는 존재입니다. 벌써 3가지가 넘는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죠.
[출처 및 참고자료]
하지현,『정신의학의 탄생』, 해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