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세상에 혼자 자란 사람이 있을까?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어투독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1985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막달레나 세탁소’라고 불리던 수녀원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막달레나 세탁소에는 미혼모와 젊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성폭행 피해자, 고아 소녀들도 있었다. 교활하게도 세탁소는 종교시설이라는 가면을 쓰고 갈 곳 없는 여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그녀들을 착취했으며 성폭행했고 심지어 미혼모의 아이를 돈 받고 입양 보내기까지 했다. 이런 만행은 1996년 9월 25일까지 무려 7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성탄절을 앞둔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의 가족은 수녀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살았다. 주인공은 그렇게 부유하진 않지만 석탄을 팔아서 그래도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 없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다섯 딸의 아버지였다. 그의 이름은 펄롱. 펄롱은 사소한 친절을 자주 베푸는 사람이다. 아이에게 동전을 주거나, 외상으로 석탄을 팔거나, 잔돈을 받지 않거나. 펄롱의 아내인 아일린은 남편의 그런 부분이 조금은 못마땅하다. 다섯 딸을 키우기에도 예산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일린은 보다 현실적인 사람이다. 길에 쓰러져있는 술 취해있는 알코올중독자를 보고 그녀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아내의 말을 들을 때면 펄롱은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불쌍한 사람 뭐가 그렇게 괴로울까?"
"술 때문에 괴로운 거야. 눈곱만큼만 이라도 자기 애들 생각을 한다면 그러고 돌아다니진 않겠지. 딱 끊고 정신 차렸겠지."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럴 수 있어.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 갔다가 학대당하는 여자 아이들을 목격했다. 펄롱은 수녀원 세탁소에서 봤던 것을 아일린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가 과한 참견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이 다섯을 케어해야 하는 아일린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세탁소의 일은 마을사람들 역시 다들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괜한 오지랖으로 최소한의 일상마저도 유지하게 못하게 된다면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찝찝하다. 펄롱은 그 찝찝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우리애가 그 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펄롱은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펄롱의 어머니는 고아였다. 운이 좋아서 미시즈 윌슨부인의 집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을 시킨 남자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윌슨 부인은 이 어린 미혼모를 병원에 데려가고 펄롱이 태어나는 것까지 지켜봐 주었다. 펄롱이 계속 느끼던 찜찜함은 받은 친절과 베풀지 못한 친절 사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도움을 요청한 여자아이들을 도와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내면의 목소리, 천사와 악마.

펄롱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꿈틀 대기 시작했다. 눈앞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도움이 절실한 아이에게조차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니까’ 같은 부실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것조차 못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모순라고 느꼈다. 산타조차 두려워하는 막내딸이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이 되기를 바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최소한의 행복은 어쩌면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선행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선행들이 누적된다면 산타조차 두려워하는 아이도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 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을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도 내보지 않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가지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누군가는 그런 선행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내가 베푼 선행이 다른 선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꽃을 기대하기는 하지만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해서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렇듯이 선행은 베풀면 그만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선행을 베풀기 전보다 베푼 후에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결국 펄롱은 아이를 구해내 집으로 데려간다.

사실 세탁소의 아이들을 목격하기 전에도 펄롱은 고민이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상이 싫어서 자신의 아버지 역시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그런 아버지의 기질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반복되는 일상에 친부에 대한 고민까지 더 해져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세탁소의 아이들을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옴으로써 깨달았다. 펄롱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남을 돕는 일이었다.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떄조차도.


자수성가? 세상에 혼자 자라는 사람이 있을까?

아이를 구하고 나서 펄롱은 삶에 또 다른 의미를 찾아냈다. 그렇다면 펄롱의 이런 선한 심성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다. 말했듯이 펄롱은 운이 좋았다. 윌슨부인을 만나고 네드(네드는 윌슨 부인 집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펄롱의 친부였지만 펄롱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다)를 만난 것. 그분들의 사소한 친절이 없었다면 펄롱의 어머니는 세탁소의 여자아이 같은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지금의 펄롱, 남을 돕는 일에 행복감을 느끼는 펄롱을 만든 것이었다. 그분들의 친절은 사소했지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맞춤법을 가르쳐주고, 부족한 것이 없이 생활하게 해 주었으며, 자신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준 윌슨 부인의 친절이. 버릇없이 굴면 혼내주고, 면도하는 법을 알려주고, 구두를 닦아주고, 아들을 미천한 일꾼의 핏줄이 아닌 귀족 가문의 핏줄로 살아가게 해 준 네드의 친절이. 가난한 이에게 동전을 주고, 거스름돈을 주인장에게 다신 돌려주고, 추운 겨울 돈이 부족한 이웃에게 외상으로 땔감을 주고, 선물 받은 사탕을 더 어려운 이들에게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그런 펄롱을 만든 것이다. 펄롱이 이웃에게 친절한 이유는 윌슨 부인과 네드의 친절 덕분이었다. 윌슨부인과 네드 덕분에 많은 이들이 겨울에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 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펄롱은 운이 좋아서 윌슨부인의 집에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펄롱과 펄롱의 모가 받은 윌슨부인의 친절은 펄롱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다. 그렇듯 저 세탁소의 여자 아이들과 알코올중독자의 불행 역시 그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 나의 행복은 당연시하면서 그들의 불행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혼자 자란 사람은 없다. 가끔 자수성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은 정말로 혼자 자랐을까? 사소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친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받은 친절을 나눠줄 필요가 있다. 친절이란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이다. 친절이란 베풀면 두 배가 되는 것이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일.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주는 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소설의 처음 펄롱의 감정은 주로 무기력감이었다. 그러다 수녀원 세탁소의 아이들을 목격한 이후로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이를 구해옴으로써 무기력감과 죄책감을 모두 해소시킨다.

주인공의 고뇌를 저자는 암시적 문장들로 표현해 내는데, 특히 마을을 가로지르는 배론강에 주인공의 마음을 자주 빗댄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구하는 게 옳을까, 모른 체하는 것이 옳을까, 펄롱의 마음은 갈팡질팡 하고 있는데 배론강이 고민하지 않고 잘도 바다를 찾아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 배론강에 비치는 마을의 모습과 진짜 마을 모습 중 무엇이 좋은지 마음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보이는 그대로를 보는 것과, 뒤에 숨겨진 진실을 눈치채는 것이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모르겠다는 의미다. 만약 세탁소의 아이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펄롱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키건의 문장은 담담하지만 감정을 흔든다. 작은 물방울 같은 감정이 유리 위로 천천히, 그리고 무한히 떨어지는 느낌이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물방울이 유리를 깨고 결국 큰 파도를 만들어낸다. 처음엔 사소했지만 끝엔 사소하지 않은 것이 된다.


손에 쥔 것을 놓칠까 봐 도움이 절실한 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운의 역할을 간과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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