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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삶 Jan 08. 2025

성공의 정의

무한대로 사랑하고 아낌없이 나누는 삶

“큰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평가받는 배우인 영화 ‘매트릭스’와 ‘존윅’ 시리즈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는 자산이 4,000억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집도 값나가는 차도 사지 않고 자선 단체를 설립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많은 돈을 기부하며 살아간다. 검소와 나눔이라는 자신만의 성공 정의를 따라 사는 것이다.”

-<꽃은 누구에게나 핀다(오은환)>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성공’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지.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을 열심히 좇으며 살아왔다. 높은 성적, 명문대 진학, 선망받는 직업, 예쁜 외모와 날씬한 몸매, 멋진 배우자와의 결혼, 넓고 깨끗한 새집, 크고 멋있는 차, 휴가 때마다 떠나는 해외여행, 화려하게 보이는 생활 등등. 이런 것들을 갖게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한눈팔지 않고 부단히도 열심히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매우 불안정했고 비교와 경쟁에 지쳤으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매 순간 위태롭게 삶을 이어왔다. 사회가 정해준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늘 바쁘고 또 바빴으므로 나는 성공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성공을 스스로 정의 내리려는 시도를 할 수조차 없었다. 뭔가 ‘진짜 나의 삶’과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어렴풋하게 드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보다도 세상을 사회를 타인을 더 신뢰했기에 큰 의심 없이 그들의 말을 자발적으로 따라왔다.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위험한 선택을 하면서 ‘가짜 삶’을 연기하듯 꾸역꾸역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가면은 언젠가 벗겨지게 되는 법. 가짜로 살기에는 내 안에 꿈틀대는 생명력이 너무나 강했나 보다. 화려하고 무거운 가면이 너무 불편하다고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내 안의 목소리가 결국 나를 이겼다. 내가 그동안 성공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하나씩 버려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 수 있다고 강하게 믿으며 살아왔는데 ‘가짜는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반대편의 길로 가보는 것. 나를 지탱하던 신념체계가 무너져버렸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지 막막했다. 애쓰고 바둥거리며 쟁취한 나름대로의 사회적 성공들은 이제 나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새로운 의미가 필요했다. ‘진짜’를 찾기 위한 숱한 실험과 시행착오들이 이어져야 할 터였다.


미니멀리즘 철학의 도움을 빌려 물건과 같은 물질적인 가면부터 하나씩 벗어내기 시작했다. 진짜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비우겠다는 다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 채 빠르게 청소하고 정리를 해나갔다. ‘이 물건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로 왔지?’, ‘이 물건을 살 때 나의 마음 상태와 생각은 뭐였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닐까?’ ‘내가 사용하기 편한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걸 샀던 건 아닐까?’, ‘남들이 하나쯤 다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따라 샀던 건 아닐까?’, ‘진짜 내가 선택한 건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차근차근 던져보며 물건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다. 물건을 비우며 맞이하는 해방감의 쾌락을 맛본 뒤로 비움의 영역을 인간관계와 습관과 신념 등으로 넓혀갔다. 늘 그래왔듯 열심히 바쁘게 달리고 또 달렸다. 가면을 벗고 벗고 또 벗어서 진짜 나의 맨 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하지만 어느 순간 또다시 찾아온 의구심과 공허함. ‘이 또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외부에서 제시하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좇는 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진짜 나’를 먼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가짜 뒤로 숨겨버리는 가면들을 먼저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가면들을 버리고 또 버리고 나면 진짜 나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으며 나의 과거와 지금을 모두 부정하며 나를 아프게 했다. 비우고 또 비우면 진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대단히 잘못된 접근이었다. 나의 정체성을 단 하나로 규정지어 박제시켜버리려는 위험한 사고였다.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게 어찌 그렇게 변치 않고 고정적일 수 있겠는가. 어찌 단 하나일 수 있겠는가. 대체 무엇이 가짜이며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진짜만 남기고 가짜는 버리겠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나를 학대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깨닫는다. 나의 것과 내 것이 아니 것을 뚜렷하게 구분 지으려는 그 마음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음을 깨닫는다. 나 스스로 나를 내 삶으로부터 소외시키고 고립시켜 왔음을 깊이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흘러가는 유동적 존재이다. 늘 변화하는 존재이며 늘 움직이는 생명에너지이다. 다양성과 입체성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진짜처럼 보이는 것들과 가짜처럼 보이는 것들이 서로서로 자연스럽게 버물어져 만들어진,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린 것처럼 보이는 것들과 그때는 틀렸으나 지금은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모두 포함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초월하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복잡한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진짜 나를 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쯤에서 그 시도를 포기하려 한다. 나는 아마도 영원히 진짜 나를 찾을 수 없으리라. 나라는 존재는 찾아질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라는 사람은 오직 지금 여기에 복잡성과 다양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떠안은 채로, 하나의 정체성을 묘사하는 말로 단순하게 정의 내려질 수 없는, 그저 자유롭게 흘러가는, 무한대로 넓어지는, 세상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맥락적 존재이기에.


그리하여 내가 현재 품고 있는 성공의 의미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지금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것을 허허 웃으며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넓고 관대한 마음’,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 꿈꾸고 바라는 성공의 모습이다.


미국의 시인 마야 엔젤루도 성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걸 좋아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걸어온 길을 좋아하게 되는 것”


지금 여기 이대로 존재하는 내 모습에 의심을 품지 않고, 진짜 나를 발견하겠다는 헛된 시도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은 나의 생명력을 느끼며, 마음을 활짝 열고, 나와 세상과 사회와 타인 그 모두를 편견과 차별 없이 공평하게 무한하게 사랑하는 것.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며 나의 존재와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푸는 것. 결국 ‘사랑과 나눔’으로 압축할 수 있는 내가 정한 이 성공 정의를 따라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자아에 집착했던 과거를 흘려보낸다. 나의 것이라는 환상에 붙들려 있던 마음을 해방시킨다. 내 안으로 안으로만 너무 침잠해 들어가던 나의 에너지를 세상 밖으로 꺼내 훨훨 날려 보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더 크게 내 쉰다. 가볍다. 가뿐하다. 드디어 방황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랑과 나눔’을 통해 나는 진정하고 진실한 성공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통해 나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나를 활짝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움츠렸던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과 진실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과 함께 어울리며 동지애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삶은 다정한 사랑의 온기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성공과 행복이 이렇게 온 세상에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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