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고
엄마는 딸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종종 오해와 간섭, 때로는 혐오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그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응시는 '세대 간 이해'라는 말이 얼마나 복잡하고, 더디며, 그러나 가능한 변화의 여정인지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나는 화자인 엄마에게도, 딸 그린에게도 모두 공감이 갔다. 이해가 불가능해도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걱정과 불안을 멈출 수 없는 그 마음이 더욱 와닿았다. 작중 엄마는 요양보호사다. 아버지 없이 딸을 혼자 키우며 살아온 삶은 고단했고, 그래서 딸에게는 더 '나은 삶'을 기대했다. 하지만 딸은 대학 강사라는 불안정한 직업에, 남자가 아닌 여자를 사랑하며, 해고된 동료를 위해 시위에 나선다. 엄마는 이런 딸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거부하고 싶어진다.
내가 엄마라면 딸의 평범하지 않은 성 정체성 자체보다, 그로 인해 사회에서 모난 돌처럼 부정적인 편견들을 감내하며 살아야 할 팔자에 대해 더 마음이 안타까웠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각 속에서, 또 현실에서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다. 그래도 딸이 진정 원하고 행복하다면 나는 지지해 주었을 것 같다. 그린을 보면서는 내 모습도 어느 정도 겹쳐졌다. 20대 때 나는 사회운동과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참여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때 부모님은 나를 지지해 주셨지만, 지금 4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에 뭔가 이렇다 할 안정적인 직장도 없이, 남편과는 사별하고 혼자 여전히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짊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엄마는 뒤늦은 후회를 종종 내비치신다. "그때 아이를 지지하기 보다 더 나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것 같다.." 그렇게 후회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내 자신이 더욱 위축되고 내 삶이 부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의 난 조금 자존감이 떨어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린은 남의 부당한 일에 보증금까지 빼서 투쟁을 한다. 나도 부당한 일까지는 아니어도 지구 환경을 위해, 또는 인권 개선을 위해 캠페인에 참여하거나 직접 캠페인을 기획하기도 했고, 적지 않은 돈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나 자신을 희생한 거라고 느껴본 적은 없는것 같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순수한 마음의 방향대로 따랐을 뿐. 그런데 책에서 엄마인 화자는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p.22)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늙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일지 모른다고 여긴다. 나도 지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린처럼 나도 부당한 세상과 화해하지 않은 듯한 삐딱한 삶을 살아 왔지만, 내가 마주 한 2025년 현재의 내 삶은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삶인 듯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성, 엄마가 돌보는 치매 환자 젠. 결혼도 자녀도 없이, 평생 타인을 위해 헌신했던 이 여성의 말년이 너무나 쓸쓸하다. 병원도, 사회도, 아무도 그녀를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젠과 같은 말년을 맞이하는 노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지하철에서 어느 할머니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나에게 매우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길을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친절하게 방향을 말씀드렸는데, 그 할머니는 여러 번 반복해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유유히 떠나가신 적이 있다. 그때 문득 나는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미래 모습이 겹쳐서 보인 것 같았다.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약해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문득 절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젠을 보며 나는 또다시 나의 미래를 그려보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나도, 이해하고 싶지만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을까? 나는 어떤 편견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선입견은 이런 것이다. 대화할때 지성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사람,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성공, 출세, 돈을 많이 버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타인의 슬픔이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에 대해 개인적 문제로만 치부하는 사람. 책읽고 사유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은 편견이 맞나? 아니면 무엇일까..?
『딸에 대하여』는 모녀가 완전히 화해하거나, 모든 것을 이해하며 끌어안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둔다. 그 변화는 엄마가 딸을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딸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딸의 삶을 ‘부정하지 않기로 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편견과,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낼 수 있는지, 깊은 고민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결국 『딸에 대하여』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음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그리고 관계란 시간이 걸려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더 넓게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