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그다지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마도 평소 관심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서인듯 하다. 사전을 보면 영웅이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 한다.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다는 건 일단 비범할 정도로 능력이 있고 불굴의 의지와 끈기를 지녀야 가능한 것이다. '그럼 일단 나는 패스~' 이 말부터 나온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보통사람인 나도, 어린 시절엔 나만의 영웅이 있었던 것이 슬며시 떠오른다. 내 영웅은 유관순이었다. 아홉살 즈음 유년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집에서 유관순 열사를 알게 되었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 모습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었다. 일제의 부당한 억압과 고문으로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는 어떻게 그토록 용감하고 당당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내 눈에도 유관순은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나의 첫 영웅 유관순에 대한 기억은, 이후 내 삶에 있어서도 부당한 것에 침묵하지 않고 항의하는 모습을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게 한 것 같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번 쯤은 가지게 된다. 수년 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흥미로운 것 중 하나가, 독자의 읽기 발달과정이었다. 아동기에는 '영웅서사', '권선징악' 같은 단순한 스토리, '의미'와 '상징'보다는 인물의 '행동'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품에 빠지는 시기가 있다. 거의 모든 유능한 독자들은 그 과정을 거쳐 고차원적인 독해력을 습득한다. 영웅서사로 된 다소 유치한 이야기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낸 후에, '질'보다는 '양'으로 독서한 후에 우리는 성숙한 독자가 되어간다.
판타지 속 영웅은 현실세계에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후광이 빛날 정도로 멋져 보였던 그 영웅의 초라한 뒷모습을 발견하는 것. 우리 삶에서도 영웅만 같았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문득 슬퍼 보일 때, 그는 아이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슬프긴 해도 영웅의 복잡한 속내와 애환을 알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유머로 현실을 승화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