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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

손원평의 『아몬드』

by 책빛나

"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아몬드가 있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다. 아몬드, 즉 편도체. 감정을 느끼고 처리하는 뇌의 작은 기관. 그것이 선천적으로 작아 감정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소년, 윤재의 이야기다. 감정이 없는 삶이란 어떤 풍경일까?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불안도 없는 미음이란... 남들에 의해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거나 영향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뜻 강인하고 또 시크한 매력이 있을듯 하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무표정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얼마나 내면이 단단하고 자존감이 높은지 보여줄만한 확실한 증거로 보일 것도 같다. 하지만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삶의 희노애락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생존과 안전의 문제와도 직결된 것이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새삼 발견했다.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감정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고, 그놈의 감정 때문에 우리는 희극인 동시에 비극인 삶을 살아간다. 나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감정을 찾아보라면, 수치심과 치욕스러움, 질투심, 열등감 같은 것들이다. 이런 감정들은 서서히 나를 갉아먹는 벌레 같다. 불안과 두려움은 너무나 만연해서 그냥 익숙한 삶의 풍경이기도 하고. 또 툭 하면 흘러나오는 눈물은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신체를 통해 버젓이 드러나 버리는 내 감정들...

윤재는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표현불능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엄마와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끔찍한 순간에도 그는 무표정했다.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할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일까, 아닐까? 어쩌면 감정 없는 삶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밀려오는 슬픔, 배신당했을 때의 분노, 실패 앞에서의 절망. 이런 부정적 감정들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차라리 윤재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

하지만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감정을 못느끼는 것은 진짜 해방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슬픔을 느껴봐야 행복을 알 수 있고, 외로움을 겪어봐야 친밀함의 가치를 깨닫는다. 부정적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꼭 필요한 대비점이다. 윤재가 도라라는 소녀를 통해 서서히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감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책 속 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예쁨의 발견." 할멈이 말한 사랑의 의미다. 사랑은 감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누군가의 예쁨을 발견하고, 그 존재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 나는 요즘 어떤 예쁨을 발견하고 있을까?


두 괴물의 우정: 감정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윤재는 곤이를 만난다. 비극적인 어린 시절을 겪고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또 다른 괴물. 감정이 없는 소년과 감정이 넘쳐흐르는 소년. 극단에 선 두 사람은 편견 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특별한 우정을 쌓아간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생긴다. 감정이 없어도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정은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 아닌가?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위로하고, 화날 때 같이 분노하는 것. 그런데 윤재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다. 곤이가 고통스러워할 때도, 도라가 슬퍼할 때도, 그는 그저 관찰할 뿐이다.

하지만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배울 수는 있다. 친해진다는 게 어떤 거냐는 윤재의 질문에 대한 심박사의 답처럼, 윤재는 곤이와의 관계를 통해 우정을 배워간다. 같이 앉아 얘기하고, 무언가를 먹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 윤재는 곤에게 말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준다. 판단하지 않고, 편견 없이 바라봐준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우정일지도 모른다. 감정의 공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곤이의 폭력,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곤이는 폭력적이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폭발한다. 책을 읽으면 그의 과거가 이해된다. 어린 시절의 학대, 버려짐, 배신. 그 모든 상처가 현재의 곤이를 만들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곤이의 폭력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아픈 과거가 있어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법에서도 정당방위는 인정하지만, 무분별한 폭력은 처벌한다. 그런데도 나는 곤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의 연약함 때문이다. 까칠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상처받은 마음. 윤재에게 "따뜻했냐, 그 품이"라고 묻는 곤이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이면의 상처를 보라는 것. 쉽게 단죄하고 낙인찍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정상이란 무엇인가

윤재의 엄마는 아들을 '정상'으로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감정을 연기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회에 적응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런데 '정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인가?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상이 되는 건가? 윤재는 엄마가 원하는 '정상'의 삶을 살기 위해 감정을 연기하며 살았다.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감정이 없는 윤재가 오히려 '진짜'를 구분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감 불능의 시대에 우리는 종종 공감과 동정의 미세한 한끗 차이를 놓칠 때가 많다. 동정하는 마음이 공감이라고 착각하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삶에서 어떤 비참함을 느끼는 순간, 남들의 어떤 시선이나 행동,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날아온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느낀다. 저들이 나를 동정하고 있다는 것을... 비영리단체에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주로 운영하곤 했던 예전에, 기부하는 후원자들의 태도에서 살짝 보여지는 눈빛이나 말들이 그랬다.


『아몬드』를 읽으며 나는 내 감정들을 돌아봤다. 감정을 억지로 숨기려다 소진되어 버리고, 감정에 휘둘려 후회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는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삶이 주는 감정들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온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아몬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결국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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