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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Feb 02. 2021

영화 기생충 - 견고한 계급 안에서 숨 쉬기

기생충 – 견고한 계급 안에서 숨 쉬기     


아래는 네이버 영화 소개

폐 끼치고 싶진 않았어요


소개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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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에게 새삼 놀랐던 것은 내가 20대 중반 반지하 방에 살았던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었다. 누군가의 영화 감상 글을 읽고서야 내가 반지하 방에서 살았던 시간이 새삼 떠올랐다. 그 반지하를 무의식의 지하에 가두고 싶었나보다. 나의 반지하 방에도 영화 ‘기생충’의 첫 장면에 나온 곱등이와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바로 바퀴벌레, 밤에 자다 불을 켜면 빛보다 빠르게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다.     



‘기생충’에서 영화의 절정에 다다르는 거실 장면이 있다. 천장에서 카메라로 기택 가족과 박사장 부부를 내려보는 식으로 보여주었다. 소파에 박사장 내외가 누워있고 테이블 밑에 기택네 가족이 있을 때 소리 없는 움직임이 기택 부인이 말한 “주인이 오면 바퀴벌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대사가 복선이 된다.     



한바탕의 소란 후 우여곡절 끝에 주인이 잠든 사이, 그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숨어 있다 자는 걸 틈타 어둠 속에서 벌레처럼 몰래 기어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기택 부인의 말이 씨가 되어 그들이 그림자처럼 슬며시 빠져나오는 상황이 씁쓸했다. 사람을 벌레에 비유해 술병을 깬 기택이 장난한 것처럼 웃지만 찰나의 침묵으로 그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났다. 그는 부인의 말을 부인하고 싶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기택은 속으로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겉으로는 가족뿐만 아니라 현실 속 자기 모습을 자신도 속이고 있었다.     



작렬한 태양 아래 지하실에 있던 근세의 훤히 드러난 몸에서 나는 지울 수 없는 냄새에 대해 박사장이 역겨워하고 경멸하는 눈빛과 표정을 기택은 마주한다. 근세는 자신처럼 대만 카스테라 사업이 망했던 사람이다. 기택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근세의 몸에 자신의 몸을 투사해 박사장이 혐오하는 건 바로 자신의 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냄새였다. 자신도 무력하게 사업이 망해 어떻게든 살고자 애썼던 지난 세월이 냄새 하나로 존재하는 것 같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집’은 자신의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좋은 집을 가지려는 건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기생충에서의 ‘집’이라는 공간은 계급에 따라 생활하는 층과 높이가 다르다. 기택 가족과 근세 부부는 어떻게든 자신들이 자유로이 누리는 1층의 공간, 중산층의 자유로움을 잠시나마 만끽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품은 냄새는 몸에 배어 신분 세탁을 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정은 자신의 계급을 바꾸기 위해 주도적이고 치밀하다. 박사장 부인이 제시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자신의 몸값을 높인다. 운전기사를 자르고 아버지를 대신 그 자리에 앉힌다.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기정은 욕조에서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고 거품 목욕을 한다. 다른 가족의 말에서도 기정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데 뭔가 다르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향기로 바꾼다.     



기정은 박사장 가족과 계급의 선을 넘나들고 그들과 협력하려 했으며 같은 계급에서 문광 부부와 공간을 공유하며 살려 했다. 기정이 그들에게 아침 식사를 갖다주려 하면서 그녀의 엄마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한 번 얘기해봐야지.” 했던 대사에서 드러난다. 그런 기정을 근세가 죽인다는 설정은 참으로 현실적이면서도 비극적이다. 근세 부부가 그토록 원한 ‘계급이 상승된 모습’을 기정이 취하고 있다. 어쩌면 박사장보다 그들에게 더 위협적인 인물이다.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의 욕구가 없는 척해야 살 수 있다. 질시하는 모습을 없애야만 살 수 있다. 그래야 유지할 수 있으므로.      



근세는 왜 기정을 죽였을까? 근세는 기정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의식 안에서 올라오는 계급을 탈환하여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를 거세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지하에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집에 숨어들기 이전에 원래 가졌던 삶의 충동, 생기를 없앤다. 만약 근세 자신이 무언가 다르게 살려는 욕구로 그 집에서 나가거나 부인과 함께 다른 일을 도모한다면 그는 다시 실패, 혹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문광(배우 이정은)이 쫓겨나 며칠 동안 배회한 바깥세상은 지옥이었다. 같은 계급의 사람에게서 나는 상위 계층의 냄새를 없애려한 것이다.     



계급의 구조는 영화 ‘기생충’ 속 잘 지어진 집의 콘크리트처럼 튼튼하다. 웬만해서는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 근세 부부가 찬양했던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계급에 따른 분배다. 계급에 따른 자기 몫의 식량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의식주만 확보되면 상위 욕구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박사장의 가족이 외출한 틈을 타 잠깐씩 누리는 상류층의 놀이도 살짝 달콤한 맛을 보는 충족이었지만 그들에게 생존 욕구 외의 욕구는 위험한 것이었다. 최소한의 것만 누리고 그 외의 것은 욕망하지 않는 것, 박사장을 신처럼 숭배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살게 한 동아줄이자, 꽁꽁 묶어놓은 덫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세의 모습일까, 기정의 모습일까? 자본주의에서 어떻게든 상위로 올라가기 위해 기를 쓰는 중일까, 아니면 근세처럼 그 시스템 안에서 체념한 듯 최대한 적응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사는 중일까? 어항 속 물고기가 가장 중요한 투명한 물 없이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듯 유유자적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현대판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의 월든처럼 말이다.   


   

견고한 계급 안에서 자신의 냄새에 질식하지 않고 숨이라도 자유로이 쉬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영화는 관객에게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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