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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Dec 11. 2018

11. 내 인생 최초의 기억과 핵심감정

나의 인생영화의 첫번째 장면은 뭐였나요?

  내 인생 최초의 기억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그 시기는 보통 빠르면 2~4살부터 학령기 전후 7~8살까지의 어떤 감각이나 경험이 생각날 거에요.

  저는 몇 살인지 정확치 않지만 잔디밭에서 누군가에게 사진 찍히는데요.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보고 맛이 어떨까 싶어 좀 뜯어 먹고 써서 뱉었던 기억이 나요. 떫은 맛과 사진 때문에 그나마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는 추억들이 조각처럼 뇌 안에 남아있죠? 가족, 친구, 하키에 관한 추억들이요. 그것들은 아주 의미있고 반복되고 우리의 생존에 필요했던 것이기에 장기기억 속에 저장되었습니다. 라일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감각경험들이 느껴지고 점점 커가며 브로콜리는 거부하는 것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은 무의식적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상처는 몸에 새겨지듯 남습니다.
제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 한 번 분유를 뜨겁게 타서 준 적 있었는데 그 때 혀와 입천장이 데였는지 그 이후 커서도 우유가 조금이라도 뜨거우면 울었습니다.
그냥 무조건 반사 반응이었어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몸은 기억한다'는 책을 읽으며 우리 아이의 행동이 이해되었습니다.

  '첫 기억'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정신과 의사 이동식 선생님입니다. 첫 상담 시간에 내담자에게 첫 기억을 물어보시곤 하셨어요. 문홍세 선생님께 전해듣기로는 이선생님 내담자 중에 아주 똑똑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돌잔치에서 친할머니가 어머니를 째려보는 걸 기억했다고 합니다.

  이동식 선생님의 도정신치료에서 주장하신 바는 첫 기억이 내담자의 핵심감정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도정신치료 입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례O는 "하고 싶은 걸 하면 엄마가 죽을 걸 같아요" 였어요.
첫 기억이 입학식 때 학교에서 돌아가서 집에 가서 어머니께 매를 맞은 경험이었어요. 그 때부터 자기 안에 울분이 많았고 엄마가 싫었습니다. 이 내담자는 고2때 어머니 돌아가시는 꿈을 꾸고 조현병이 발병해요. 그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공격성, 적개심을 참았고요. 고2때 소망충족적인 꿈을 꾸자 그 충동이 실현될 것 같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망상 증상이 생깁니다.

    최초 기억과 핵심감정의 관련성이 무조건 맞는 건 아니지만 저 또한 많은 내담자들에게서 첫 기억이 주는 의미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 내담자들 중에도 첫 상담에서 첫 기억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여학생은 이유없이 불안하다고 해서 어린 시절을 따라가다보니 한밤중에 잠에서 깨 일어나 보니 집안에 아무도 없었는데 집 뒷산이 무너져내려 부모가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밖에 나가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감과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갑자기 엄습했던 거에요. 지금의 불안이 그때의 불안과 연결되는지 물어보니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내담자는 스타킹에 집착하는 남성이었어요. 상담에서 한 번 여쭤보았습니다. 어릴 때 보육기관 선생님 스타킹을 만져본 적 있었냐고요. 그랬더니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여선생님 다리가 예뻐서 한참 보았고 그 스타킹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 분이 차라리 선생님 다리를 직접 만졌다면 상담실까지 오진 않았을 거에요. 많은 아이들이 성적 호기심이라기보다 엄마처럼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자 애착행동으로 선생님 몸이나 머리카락을 만지거든요.

  TV 속으로 가볼까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황교익 선생님의 첫 기억은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 목걸이를 입에 넣어 혀로 촉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건축가 유현준 선생님은 부모님께 무언가를 만들어 보여드렸더니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던 걸 떠올렸어요. 놀랍지 않나요?
현재 하시는 일과 끼어맞추는 것 같지만요. 구강기에 혀의 민감함과 미각, 창작과 건축가로서의 인정받음이요. 그 분들의 인생영화 첫 장면과 현재가 오버랩됩니다.

  첫 기억은 내가 인생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만드느냐를 가늠합니다. 

기억은 사실과 다를 수 있거든요. 과장, 삭제, 축소, 왜곡합니다.
마치 인생 장면의 주인공, 등장인물, 분위기, 색채, 시공간까지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요.
내 생존에 필요한 방향으로. 또한 내가 보고 싶은대로, 듣고 싶은대로 각본을 화려하게 각색합니다. 말 그대로 자기 중심적인 기억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그 경험이 나에게 중요했고, 반복된 경험이었을 가능성, 상처와 가장 근접하여 내가 주로 느끼는 바로 그 감정과 맞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느낌, 애착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내담자가 어린 시절 한여름 티비 속 수영장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봤어요. 자는 엄마를 깨워 나도 놀고 싶다,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했대요. 그랬더니 엄마가 일어나지 않았고 자기는 짜증났지만 나중엔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답니다. 그 장면에서 나와 엄마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원하는 게 있어 엄마에게 요구하지만 엄마는 지치고 피곤해서 거절하고요. 거절감에 부탁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일찍부터 독립해 살아온 내담자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내담자가 성인이 되자 부모님은 진로에 대해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는 딸의 행동이 서운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요. '엄마는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홀로 선택하는 것이 더 편하고 덜 상처 받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가만!
혹시 첫 기억이 없다고 아쉬워하는 건가요?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없다기보다 어떤 걸 처음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수 있구요. 기억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도 있답니다.
어린 시절 사진첩을 들춰 보며 부모님께 이야기를 들어도 좋고요. 소중히 간직해오던 물건을 찾아 만져보고 써보면 떠오르는 게 있을 거에요. 그 때 당시 나를 알고 어울렸던 사람들과 추억을 소환시켜도 됩니다. 동네 친구들, 초등학교 동창들이 생생한 증인이죠.

마지막으로 당부 말은 부디 첫 기억과 핵심감정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변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지 말고요. 그리고 꼭 처음이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어요. 내게 가장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면 되죠.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요. 지금부터 내가 긍정적이고 좋은 정서 경험을 자주 만들어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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