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부터 구해요!
배우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죠.
"내가 널 구제해줬다.", "나 아니면 누가 너랑 결혼했겠니?" 같은 농담이요.
우리는 관계에서 구원, 구제라는 말을 종종 씁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구원은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한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간혹 슈퍼 히어로처럼 누군가를 간절히 살리고 싶고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죠.
그 사람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라면 더욱 그렇고요.
지난번에는 황혼 이혼 대신 남편에게 누이처럼, 엄마처럼 대하기로 마음먹은 60대 여성분 사례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결혼 전에 남편을 구원해주고 싶었던 30대 여성분이 이혼을 결심한 상담사례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인은 심신이 지쳐있었어요.
이 분의 남편도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는데요. 가정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생활비를 주지 않는 부분이었어요.
남편의 무책임, 대화가 잘 되지 않는 부분, 아빠 노릇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많았어요. 상담 회기 중반쯤 부인이 말씀하셨어요.
"남편은 결혼 전에도 원래 그랬어요."
저는 바로 "이거다!" 싶었습니다.
‘원래’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연애 초반에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구를 투사하고 상대방이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장점은 과대하게, 단점은 축소시켜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지의 여부로만 상대방을 판단하지요. 상대를 볼 때만 환상적으로 부풀려진 매직아이 안경을 쓰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애하고 백일까지는 눈에 콩깍지가 씌기 마련이지요. 100일 전후로 이 사람이 원래 그랬나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답은 ‘원래’ 그랬습니다.
남편이 연애 때도 ‘원래’ 거짓말을 자주 해서 믿기 어려웠을 거예요.
어떤 이유로 그 남자를 선택했을까요? 이런 상황이 뭐 때문에 벌어졌을까요?
연애 기간에 몰랐다고 생각되지만 무의식은 알고 있어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느끼고 있답니다.
배우자에 대한 단서나 신호들이 연애하는 동안에는 충족되는 욕구, 자신의 바람, 개인의 조건, 배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들이 간과되고 무시됩니다.
내가 뭐 때문에 그 남자를 선택했는지 무의식적인 욕구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 상담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차근차근 꼬아진 실타래를 풀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의 남편도 지난번 매거진 글에서 언급한 남편처럼 자랄 때 나무가 꺾이는 것처럼 부침이 많았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랐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내를 찾기보다 '엄마'처럼 자신을 공감하고 받아주고 의존할 여성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배우자를 각각 아버지, 어머니의 대리인으로 선택합니다.
이마고 부부치료사 하빌 헨드릭스 박사의 말대로 부모 대신해서 내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이에요. 남편은 사실 자기가 의존하고 상처 받은 내면 아이를 치유할 수 있는 어머니를 고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할 때 근원적인 애정 욕구가 비어있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끊임없이 새로운 엄마, 새로운 아빠를 찾아다닙니다. 새로운 상대를 찾아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애정, 의존 욕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면 아이가 어머니처럼 무한 애정을 받고 싶은 거예요. 상처 받은 내면 아이가 진정한 사랑으로 혹은 치유의 힘으로 성장하면 더 이상 그 욕구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어머니와 비슷한 여자를 또 만났다고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죠.
남편이 원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선택한 이유는 부인이 남편을 '구원'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긴 연애 기간 동안 남편의 성정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연애하던 어느 날 남편의 집에 가보니 사람 한 명만 겨우 잘 수 있는 공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걸 봅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아, 내가 이 사람을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줘야겠다. 이 사람을 구원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다시 부인께 찬찬히 묻습니다. “남편을 구할 사람이 정말 선생님밖에 없었을까요?”,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구원이 필요 없었던 사람이었나요?”
그러면서 부인의 성장사를 들었습니다.
자신도 아가씨 시절 힘들었기 때문에 집에서 탈출하듯 결혼했다는 것, 백마 탄 왕자까지는 아니어도 가정에서 자신을 빼낼 사람은 그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요. 상담하면서 결혼생활 동안 자신이 남편에게 따뜻하게 보살펴 주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힘과 통제를 갖고 그것에 휘둘릴 만한 사람을 골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 부인은 마음대로 결정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처럼 보였지요. 남편은 안 그래도 자신감 부족하고 위축된 사람인데, 부인이 자기를 무시할 때가 있으니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아내가 아이들을 꽉 잡고 있으며, 아이들은 모두 엄마 편이라고 생각하니 남편이 더 외로웠을 겁니다. 부부는 갈등이 심하거나 어느 한쪽이 취약할 때 무의식적으로 자녀를 내 편으로 만들어 상대 배우자를 수동 공격하거나 고립시킵니다. 상담을 통해 그런 내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뜻하게 감싸줄 마음이 들진 않았습니다. 남편이 불쌍했지만, 결혼생활에 지쳐 다시 노력하기엔 멀리 왔다고 느끼셨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믿음이 깨지기도 했고요.
결혼 전 정작 구원이 필요했던 사람은 부인이었어요.
범인을 계속 찾고 있었는데 결국 주인공이 범인이었다는 스토리처럼 허무합니다. 그에게 내 '구원받고 싶은 욕구'를 남편에게 투사한 거예요. 내가 그를 구원하는 만큼 그도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욕망을 비추어 본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고통스럽고 허약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힘들 때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 안에 거울 뉴런, 공감 본능, 측은지심, 선한 본성이 잠재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심신이 약한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자신부터 살려야 합니다. 자기가 살아야 상대도 의미 있는 거잖아요. 자기 한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 하면서 어깨를 내밀고 의존을 부추기는 건 함께 쓰러지게 만듭니다.
변상규 교수님의 저서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당신 때문에 못 살아!'에서는 메시아 콤플렉스로 결혼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요. 메시아 콤플렉스는 개인이 다른 사람을 구하거나 돕는 책임이 있다고 믿는 생각입니다.
'결혼은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가 불쌍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이 앞서야 합니다. 결혼하고 10년, 20년이 흐르면 더 이상 배우자가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려는 커플이 있는데 그 커플이 서로에게 연민이 느껴져서 결혼을 결심한다면 저는 그 결혼을 반대할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욕구가 사랑이 아니니 그것을 구분하는 지혜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 자꾸 눈길이 갈 때,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순간이요.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힘든 건 아닐까?",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본 걸까?", "나와 그 사람이 비슷한 건 뭘까?"라고요.
나와 그 사람을 분리해서 놓고 보면 답이 나올 수 있어요.
일자 샌드의 '컴 클로저'에서는 '내가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때로 우리를 잘못된 안도감으로 이끈다. 상대를 어둠으로부터 구해내면 구원자인 나에게 상대방이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행복해할 것이며, 또 그런 나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므로 결코 내가 버림받는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자 샌드는 내담자들이 선택하는 구원 행동의 배경에는 상대에게 인정이라는 보상을 예상하고요. 내담자가 상대를 의존하게 만들어 자기가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거라는 기대를 정확하게 짚어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이유로 구원하고, 구원받고 싶은 거겠지요. 내가 한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구원'을 나에게 먼저 해주면 어떨까요?
한 가지만 기억해요. 우리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질문 1. 현재 내가 안쓰럽거나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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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그 사람이 가진 어떤 면이나 특성 때문에 측은지심이 드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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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나와 그 사람과 비슷한 점은 무엇일까요? 공통점이 있다면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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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4. 배우자를 선택할 때 배우자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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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 내가 배우자를 돕거나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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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6. 우선 질문 3번과 5번의 기록을 참고하고요. 그와 관련하여 내 욕구와 관련있는 게 있다면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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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7. 그 사람이나 배우자가 아닌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격려의 글이 있다면 여기에 자유롭게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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