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와 내담자의 알아차림, 마음챙김이 상담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 내담자는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상담센터에 내방하는 고객을 말합니다.
* 심리학 용어사전에 따르면 마음챙김은 불교 수행 전통에서 기원한 심리학적 구성 개념으로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비온은 상담자와 내담자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한 방에 있는 겁먹은 두 사람’이요. 저는 그 이상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상담 중에는 사실 둘 다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같은 공간에 모르는 사람 둘만 있다고 떠올려 보세요. 처음 봤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동지가 될지, 적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경계를 넘어 서로 이야기를 듣고 말하려면 상대방이 공격, 침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상담을 배울 당시만 해도 내담자를 변화의 길로 적극적으로 이끌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실력 있는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좋은 상담자 되기’ 책에 보면 상담자의 여러 욕망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커질수록. 내담자에게 변화를 강조할수록 상담은 실패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실패라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언어가 내담자의 말인 것처럼 들었을 때가 가장 효과가 좋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내 의도가 없었을 때여야 합니다. 내가 그들을 변화시키려는 의도, 내가 좋은 상담자가 되려는 의도, 내가 그들에게 따뜻함과 영향력을 주고 싶은 의도들 말입니다. 이동식 선생님의 ‘도정신치료 입문’에 나온 치료자의 자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비심이 생기려면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중립성, 골고루 가는 주의라고 한다. 이것은 노자의 무위에 해당된다. 장자는 ‘마음이 허한 곳에 도가 모인다.’고 하고 있다. ‘마음이 비어 있으려면 치료자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비온은 상담할 때 상담자의 기억, 욕망, 이해(해석)를 가능한 버리라고 말합니다(Meltzer, 1978/1998, p. 375).
저는 처음에 “솔직히 이게 도 닦는 거지 상담입니까?” 하고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글들이 진실이며 상담자가 그것을 얼마나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제가 초심자 때 여자 청소년들 상담할 때 그들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한 명은 내 안에 상처를 선생님이 수술하고 다시 덮은 것 같다고 표현했고, 다른 한 명은 그저 말없이 들어주는 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바로 몇 초 뒤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이전에 공명했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언어’라는 건 참으로 소통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비언어적 소통이 더 정확합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와 똑같이 경험할 수는 없죠. 하지만 내담자의 언어와 비언어적인 표현을 통해 그 감정을 느끼는 동안 함께 존재할 수 있거든요. 같은 공간, 시간에 있어주는 것,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게 힘든 감정을 볼 수 있도록 묵묵히 견디고 버텨주는 것, 그게 다예요.
저도 사람인지라 의도와 욕망이 매번 없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니 내가 텅 비어 있는 상태여야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내담자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과 인정도 거부하지 않아야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상담이라는 작업 자체가 수도자가 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싶습니다. 저는 ‘상담’이라는 학문을 그간 학교에서 열심히 배웠는데, 내담자들은 그것을 다시 비우라고 말합니다. 마치 미대에 가기 위해 애써 기법을 익혔는데 입학하고 나니 그런 기교를 버려야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상담의 모습은 이러한데, 내담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담자는 뭔가 이야기하면 상담자가 반응하길 원합니다. 문제해결방법과 조언을 구하죠. 상담자는 기본적인 경청과 공감, 명료화, 반영, 해석 등의 반응을 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반응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제 욕망은 힘이 아주 세거든요.
결론부터 말하면 내담자가 원하는 ‘답’과 ‘해결책’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알지만 실천이 잘 되지 않는 거예요. 이미 머리로 알고 몸으로 여러 가지 애를 써본 다음 모든 것이 소용없을 때 상담실에 오거든요. 대부분 내담자들은 많은 것들을 해본(doing) 후에 진정 나 자신으로 존재(being)하지 못해 오게 됩니다.
내담자가 지금까지 썼던 방식이 스스로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 온 에너지를 끌어 버티고 버티다가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상담실로 발걸음합니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나오는 것처럼 휴대전화 배터리가 약 3% 남은 것처럼 방전 직전에서야 위기감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죠. 그러니 내담자는 심신이 소진되어 약해진 상태로 첫 상담을 시작합니다. 상담에 오기 전부터 지쳐있기 때문에 상담자가 지지해주고 힘을 주길 원해요.
이런 상태에서 내담자가 선생님이 먼저 답을 알려달라고 하면요. 상담자가 유능해지고자 하는 욕구로 답을 제시하고 어떤 제안이나 지시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내담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실천하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상담실에 오기 전에 이미 내가 노력, 시도했던 시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증상은 괜히 생기지 않고요. 내가 애썼던 방법, 행동들도 의미가 있어요. 심리상담에서 증상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기제이자 생존방식, 방어기제라고 봅니다. 그러니 함부로 없애거나 상담을 통해 다른 방향,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들 자신이 바로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상담 한 회마다 자신의 욕구와 두려움을 자각하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입니다.
상담자-내담자 관계는 일상에서 맺는 관계와 달라요. 평상시 수다 떠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치료적인 대화를 합니다. 그러기에 심리상담을 받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보겠다는 결심, 내가 모르던 모습까지 직면하겠다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렇게까지 하기에 힘이 달리면 상담을 받기 망설여질 거예요. 그래도 상담자는 내담자의 이러한 소진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의식으로 보라고 들이밀거나 직면, 해석하는 말로 내담자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상담자가 늘 깨어 있고 상담 안에서 의식하고 있다면 가능한 공감과 지지를 먼저 행할 거예요.
저는 상담 시간만이라도 개인적인 기억, 경험, 역전이 감정을 끊임없이 비워내고 싶습니다.
그래야 내담자를 비춰주는 맑은 거울, 어느 그릇에 담겨도 그릇의 모양을 내는 물처럼 되지 않을까요? 아주 이상적이고 터무니없는 말이긴 하지만, 마음을 자꾸 비우려고 합니다.
여기에 이렇게 써놓으면 더 잘 비워질 것 같습니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고 욕망의 바다와 같은 무의식이 크지만요.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려 합니다. 마음챙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