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서재 Aug 18. 2019

피해자(희생자)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

남에게 관심을 구하기보다 자기 돌봄부터 시작하자.

15년 전쯤 내가 정신과 의사 개인 분석을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의 표현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네가 청순가련 여주인공이냐는 말씀이셨다.
순간 내 모습이 확연히 직면되었다.
아하! 내가 그런 모습으로 비치는 거구나.
선생님의 표현이 어찌나 적확했는지.

불쌍한 게 아닌데 불쌍한 듯, 피해를 받은 게 아닌데 피해자인 듯,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만 희생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왜 그랬을까?
자발성, 주도성, 적극적인 태도를 발달시키지 못하고 수동 공격적으로 했던 표현, 행동들이 있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기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은 받고 싶다 보니까 분명하게 의사를 결정하고 표현하지 않았다.
양다리 걸치듯 말하거나 앞에서는 부탁하는 것에 대해 '네' 했지만 뒤에선 거절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렇게 내가 사랑받기 위해 선택해놓고 다른 사람의 진정한 관심을 얻지 못한다고 느끼면 화가 나 괜히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왜 나만 희생하지, 피해를 받지? 싶었다.

기브 앤 테이크로 마치 거래하는 듯하다.
나는 너를 위해 이만큼 양보하고 배려할 테니 당신도 이 정도는 해야지.
한다면 그 거래가 괜찮은 걸까?
만약 상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희생해야 하는지?


대표적으로는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희생형이 많다.
<엄마, 주식 사주세요>의 존 리 대표는 강연이나 책에서 우리나라 부모와 외국 부모를 비교하여 자주 말씀하신다.
미국 이민 1세대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온몸이 부서져라 교육비에 투자했다. 결과 자녀들이 미국식 교육에 익숙해져 부모를 돌보기보단 심리적으로 미국인이 되어 독립했다. 부모에게 한국인 특유의 정 같은 마음으로 효도하거나 자신들이 받은 투자금액을 부모에게 보상으로 돌려주기 어려웠다.
중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보다 건물에 투자하여 자녀들에게 건물을 물려주거나 사업 자금을 마련해줬다고 한다.
중국 부모들은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녀들은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 않았다.

여기서는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만 바라보게 되고 자녀들은 왠지 부담스럽게 된다.
자식들을 위해 고생했는데 아주 큰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마음으로라도 감사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2세대들은 장성해서 말한다.
그건 우리가 원한 게 아닌데요? 왜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고 우리 탓을 하세요? 혹은 우리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희생한 건 맞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부모님이 지셔야죠. 한다면?
그런 말을 듣는다면 부모님께서 억한 심정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하다.

내가 제목에 코스프레라고까지 써놓은 이유는 역할에 파묻혀 정체성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역할'이라는 옷을 입지 않은 나는 비어있을 수 있다.
실제 내가 원하는 것은 상대의 요구나 필요를 채우거나 맞춰주는 것이라고 느껴질 뿐이다.
이런 분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기도 하고 자기 돌봄이 부족한 편이다.
내가 상대에게 돌봄을 준만큼 나도 받고 싶다는 전제가 깔려있지만 정작 나의 필요가 뭔지 분명히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고 표현이 익숙지 않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더 챙겨주기 어렵게 된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욕구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잘 충족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 해주거나 그것을 해줄 만한 사람에게 진솔하고 부드럽게 부탁이나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거나 먹자 해놓고 속으로 난 그거 먹고 싶었는데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선물 사주겠지 기다렸다 아니면 실망하고
자녀들이 부모님께 뭘 원하시는지 물었을 때 괜찮다 백번 하시고 실제로 아무것도 보답이 없으면 서운해하신다.
그냥 알아서 눈치껏 맞추게 된다.

이런 부작용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 없으려면,
희생자나 피해자 모드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기를 어필해보자.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듯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건지,
스스로를 돌보든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든지.
단, 요청해도 거절당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하자.

내가 날 챙기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자기를 자꾸 봐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는 게 중요하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죽음에 이르면 결국 나와의 관계밖에 남지 않는다.
자신이 이뻐 죽는 사람 빼놓고는
희생자 모드인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수용하는 방법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평생 심리상담을 받을 수도,
영원히 가족에게 의존할 수도 없고,
친구들도 범접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결국 남는 건 나뿐이므로 나와 잘 지내야지.
아주 친해지길 바라진 않더라도
적이 되어 맹비난하거나 내 바람을 무시하지 않고
'나'라는 아이를 다시 키우듯,
그렇게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
어느덧 희생자 모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그런 존중과 대우를 해줄 것이다.

그 경계와 상황에 대한 감각은 연습하고 갈등하면서 겪는 수밖에 없다.
정답은 없다.
그저 상식이나 법의 수준 벗어나는 게 아니라면, 무방하다고 본다.
그래도 내 욕구 한번 챙기면 상대의 욕구도 눈에 들어와 만족시켜주고 싶은 여유가 생긴다.

내가 줌으로써 받는 에너지가 있지만,
내가 소진된 상태에서 먼저 주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내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무력하게 느껴진다면,
이번 생은 늘 희생했다고 생각된다면,
자기부터 챙기자.

작가의 이전글 처음부터 차가운 사랑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