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로서, 어머니로서 바라본 면역에 관한 이야기
이 책에 대해 처음 들은 건 3-4년 전이었다. 그 후로 믿을만한 이들에게서 아주 좋은 책이란 평을 여러 번 듣고 내 마음 속 “언젠간 읽으리” 리스트에 올려두었지만 그 리스트에 있는 많은 책들이 그랬듯이 이 책도 그 리스트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 올해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면역, 바이러스, 백신같은 키워드들을 연일 접하다보니 이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었잖아!”하며 첫 장부터 빨려 들어갔다.
책은 아킬레우스 신화로 시작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사의 몸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모든 노력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라비스는 이렇게 썼다.
“아들이 태어나자 나는 내가 지닌 힘과 내가 지닌 무력함을 둘 다 예전보다 더 과장해서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쳤다. 아이를 낳아 품에 안자마자 내가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던 어떤 감정,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아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만능감, 동시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감이기도 했던 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나는 이 저자의 사려깊음이 좋다. 결코 어머니들을 비난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질정도로 율라 비스는 접종반대나 수두파티처럼 집단면역과 공중보건 체계에 흠집을 내는 이들에 대해 얘기할 때조차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대신에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가, 왜 그들이 냉소주의와 불신에 빠졌는가에 대해 톺아본다. (하퍼스와의 인터뷰에서 율라비스는 직접적으로 털어놓기도 한다. https://starlakim.wordpress.com/2017/02/07/eula-biss-on-on-immunity/)
율라 비스는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 대체의학이나 접종반대론자들의 의견에 이끌리기도 했던 일화들을 털어놓기도 한다. 아이의 수술실에서 마취의사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율라비스는 아이가 수술실에서 마취할 때 옆에 있고 싶어했는데 그를 두고 마취과 의사가 그래봤자 애는 기억도 못할 거라며 빈정대자 내가 기억하겠죠, 라고 대응한다), 아이가 쓰던 매트에서 어떤 화학물질이 발견됐다는 걸 알게된 날 패닉에 빠지던 경험 등은 즉각적으로 나와 내 주위의 어머니들의 어떤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위협으로 느껴져 한밤 중에 자는 아이 옆에 누워 검색의 검색을 거듭하던 날들. 기저귀에서 다이옥신이, 분유에서 세슘이 나왔다고 하던 날 이리저리 바빴던 기억들. 아이가 해열제를 먹고도 열이 내리지 않을 땐 또 얼마나 두려웠던가. 백신을 맞출 때 내가 맞을 때와는 달리 왜 그렇게 부작용이나 잘못될 가능성들에 대해 천착했던가.
어떤 어머니들이 하는 경우에 유난이며 그 어머니들이 멍청하고 비이성적이며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일축될 수 있을 그런 일들. 하지만 그녀는 이 책에 그런 것들까지 모두 포함시켰다. 저널리스트이기도 하고 이 책을 준비하며 수많은 과학적 데이터와 논문, 통계들을 살펴봤음에도 어머니라는 자신의 정체성 또한 귀하게 여기는 작가, 그리고 그런 경험을 기꺼이 풀어놓는 이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처음 들어봤던 몇 해 전이 아니라 어머니-되기 경험 이후에 읽게 되서 다행이라고 느꼈을 정도다.
면역에 관하여(On Immunity). 어쩌면 이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왜 면역에 대하여가 아니라 관하여일까? 궁금했었는데 이 책을 읽을수록 정확한 언어였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면역에 대해 말하는 과학서가 아니다. 물론 면역과 백신의 역사,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주요 논쟁들에 대해서 다루지만 그건 이 작가가 이 책을 쓰는 재료일 뿐 주제는 아니다. 그보다 이 책은 면역과 관계를 맺은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뭐냐면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것들이다. 우리의 몸, 네 편 내 편을 따질 수 없는 바이러스, 공중보건, 내 몸의 타자성을 일깨워주는 미생물이라는 존재, 자연은 선이라는 환상, 건강이라는 위치재, 때로는 자본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가부장주의까지.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에서 책 이야기를 한 것이 2주 정도 됐는데 그 때부터도 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민자의 나라였던 미국은 이민을 당분간 막는다고 하고 스웨덴의 집단면역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성공/실패로 말할 수 있는 문제일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연령별로 치사율이 굉장히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런 취약계층의 죽음에 대해 취하는 태도들을 보면 어딘지 공리주의가 떠오른다. 어쨌든 스웨덴은 집단면역 실험제에서 지금은 느슨한 봉쇄체제로 변경했다.)
요즘은 코로나19 보다도 이 코로나19 시대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선진국이라는 개념이 거의 사멸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기도 하고 유럽의 사례들을 볼수록, 세계시민임을 자처하던 국가들이 사실은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이 굉장히 떨어지고 그들이 말했던 세계가 아주 좁은 개념이었다는 걸 매일매일 확인하는 기분이다. 율라비스의 말대로 우리의 몸이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면 과연 그 타자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때가 됐다는 인상이다. 많은 인문학자, 사회학자들이 천착해온 ‘타자성’이라는 주제가 바이러스를 통해 이야기 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궁금한 게 있다면 이 책이 지금 미국에서는 어떻게 읽힐까 하는 점이다. (My body my choice와 트럼프2020이 나란히 써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 중단요구 시위대의 사진을 보는 심경이란.) 면역이라는 공동의 정원을 가꾸어 가자는, 우리 몸의 타자성과 공공성에 대해 생각하자는 율라 비스의 말이, 여전히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아킬레우스 신화로 시작한 책은 나르키소스 신화로 끝이 난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 연못에 빠진 나르키소스. 율라비스는 이 신화에 대해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에게만 과도하게 몰두하여 남들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줄 모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고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경우는 잘 잊고 사는 것 같지만 타인이 나에게 환경이듯이, 나 역시 타인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말 그대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기다.
[혼밥생활자의 책장] 149화 면역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