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의 추억
26년 전, 1999년 <쉬리>가 개봉됐다. 당시 집 앞에는 강변 CGV가 새로 열었고, CGV 영화관과 <쉬리>가 만나니 강변 테크노마트는 인산인해였다.
그때 내 나이가 14살, 중학생이었다. 아버지를 졸라 온 가족 다 같이 <쉬리>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터라 꼭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흐린 오후, 나와 아버지는 강변 테크노마트로 향했다. 예매소는 1층이었는데 <쉬리>를 보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정말 번잡했다. 사람들의 기대감과 영화관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까지 예매소 1층은 정말 정신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와 2살 위인 형은 <쉬리>를 보지 못했다. 당시 <쉬리>는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던 것이다. 부모님과 같이 볼 거라고 매표소 직원을 설득했지만 끝내 영화 티켓은 구매하지 못했다. 결국 부모님만 영화관에 들어가셨고, 우리 형제는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쉬리>를 검색했다. 확인해 보니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조정되었다. 그때 당시에 <쉬리>는 조금 잔인하고 청소년한테 안 좋은 영화라고 보였던 거 같다.
그리고 비디오로 <쉬리>가 나왔을 때, 부푼 가슴을 안고 비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난 오프닝 시퀀스부터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한 명의 간첩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서 벌이는 혹독한 훈련 장면에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젊은 한석규 배우와 송강호 배우가 등장했고, 지금보다 더 날카로웠던 최민식 배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모자를 쓴 최민식 배우의 카리스마는 중학생인 날 압도했다. 거기에 더해 후반부에 최민식 배우가 한석규 배우에게 소리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대사를 내뱉으면서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당시 한석규 배우와 최민식 배우는 이미 유명한 배우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송강호라는 배우를 처음 각인시켰던 작품이 바로 <쉬리>였다. 그 후로도 송강호라는 세 글자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다.
<쉬리> 이후부터 영화 매거진을 가끔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내 기억 상에는 씨네 21이었던 것 같다. 그 잡지에서 읽었던 <쉬리> 분석 글은 단순히 액션 영화로만 봤던 내 시각을 바꿔놓았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배경을 한 깊이 있는 해석을 접하며, <쉬리>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씨네 21이 지금까지도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1999년 당시 남북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긴장감이 넘쳤다. 실제로 간첩 침투 사건들이 있었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북한 이야기를 조금은 쉽게 접할 수 있고, 남북의 격차도 명확해진 상황이지만, 당시엔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나라의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영화 <쉬리>는 바로 그 긴장감을 정확히 포착했고 이야기를 잘 풀었다.
<쉬리>는 한국 영화의 판도를 바꿨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았던 총기 액션이 들어갔고, 차량 폭파 같은 대규모 액션 시퀀스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쉬리> 이전까지의 한국 영화는 조금은 지루하고 서정적인 로맨스들이 많았다. <쉬리>는 이 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쉬리> 이후 한국 영화의 장리는 훨씬 다양해졌고, 제작 규모도 조금은 커진 듯하다.
물론 최근에 나온 영화들과 비교하면 스토리가 다소 예측 가능하거나 옛날 얘기가 많은 영화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재밌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화려한 액션, 우리나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 거기에 더해 서정적인 로맨스까지 더해졌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러서 지금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이다.
마음 같아서는 <쉬리>에 대한 분석글을 쓰고 싶지만, 오늘은 그보다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는데 집중했다. 때로는 영화 자체만큼이나 그 영화를 둘러싼 기억들이 소중한다. 1999년의 주말, 강변 테크노마트의 북적임, CGV 1층의 예매소 앞에 서있던 나와 아버지의 모습까지.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토요일 오전, 컴퓨터 앞에 앉아 <오징어게임 시즌3> 대신에 <쉬리>를 선택한 나를 칭찬한다.
26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쉬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