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왔다.

[마음이 휘어지는 자리]

by 회색달

주말 저녁. 여느 때처럼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섰다. 카페에 앉아 딱히 할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냥 걷기로 했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는 산책은 아니었고, 그냥 걷다 보면 나아지겠지, 뭐 그런 마음.


늘 지나던 골목 끝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눈에 잘 띄는 곳은 아니지만, 가게 앞에 커다란 아이스크림 모형이 있어 못 본 척 지나치긴 어렵다.

너무 과장된 딸기색이라 볼 때마다 조금 민망한데,

그날따라 그 옆에 놓인 수국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이 피어 있었다.


이른 여름인데, 벌써 성급하게 얼굴을 내민 꽃들도 있었고, 그중 몇몇은 벌써 시들기 시작했다. 가장자리가 쪼글쪼글해져 있었고, 바람이 불어도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유난히 눈에 밟혀 그 자리에 멈춰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이스크림 모형 옆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짜가 옆에 있으니, 진짜가 더 눈에 들어온다.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자기 속도로 피어 있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전에 들은 적 있다. 수국은 뿌리 하나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는데, 해충을 먹거나, 영양분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그 가지에는 애써 영양을 보내지 않는다고.


그냥 놔둔다.

자연스럽게 시들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물도 더 주고,

햇빛도 바꿔주고, 애쓰고 고민하겠지만 수국은 그냥 놔둔다. 전부를 살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게 좀 멋있어 보였다. 무책임한 게 아니라, 전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반대로 살아왔다. 하나라도 못 해내면 그게 실패라고 여겼고, 다 하겠다는 마음이 늘 나를 지치게 했다. 하나라도 못 끝내면 그게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흐트러졌다. 무기력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거겠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일에도 의욕이 없고. 사실은 너무 욕심을 냈기 때문인데, 그걸 깨닫기 전까지는 또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날 수국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다 피우지 않아도 되는데.’ 몇 송이 시들었다고 해서 그 꽃이 아닌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걸 놔둠으로써 나머지가 더 잘 피어난다는 걸, 수국은 알고 있었다.


묘하게 위로가 됐다. 최근에 자꾸 일이 엉키고,

하려던 걸 제대로 못 끝낸 날이 많았는데 그날 수국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다 못해도,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거라고.


내가 버린 것들도, 결국은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잘 해내지 못한 날이 계속되더라도

그게 나의 전부는 아니라고.


누가 보면 별일 아닌 하루. 별 의미 없는 골목의 풍경. 하지만 나한테는 좀 오래 남았다.


골목 끝, 수국이 피어 있었다. 그 자리에 조용히.

누구한테 보이려는 것도, 억지로 주목받으려는 것도 없이. 그냥 여름이 오니까, 할 일을 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다는 걸, 그날 수국이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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