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용한 낙하

5.[부딛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by 회색달


* 전국에 장맛비 소식이 들립니다. 우연찮게 창 밖의 나무를 보다 아직 채 물들지도 못한 가로수 잎들이 비바람을 못 이겨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을 봤습니다. 지난해 가을 사무실 앞 조경을 위해 심어놓은 나무 한그루에서 떨어지는 잎사귀 한 장이 떠올라 써놓은 글과 함께 오버랩해 봤습니다.




<이른 가을>

전국에 가을 장맛비 소식이 들린다.

습한 바람이 창문 틈을 지나 방 안까지 스며들고,
나는 잠깐 창밖을 바라본다.


마주한 건,
아직 물들지도 못한 가로수 잎들이
비바람에 우수수,
힘없이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조금 더 견디면,

예쁘게 물들 수 있었을까.
조금만 더 서 있었으면,
가을 햇살 아래 한 번쯤 빛나볼 수 있었을까.


생각은 자연스레
작년 이맘때로 향한다.


사무실 앞,
조경을 위해 새로 심은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바람도 덜 불던 어느 날,

그 나무에서 잎 하나가 땅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무척 얇고,
아직 연두가 조금 남은 채였던 그 잎사귀.

왜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그 한 장의 낙엽에
나는 오랫동안 시선이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낙엽이 아니라
어쩌면 그때의 내 마음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감당하지 못해 떨어지는 것이
언제나 약해서는 아닐 것이다.
때로는,
너무 억세게 버텨온 끝에
스스로를 놓아주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창밖에서 마주한 그 잎들도,
어쩌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퇴장 중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고운 색으로 물들고,
누군가는 물들기도 전에 떠난다.
모두 제각각이다.

그리고 모두,
나름의 계절을 살아내는 중이다.


<조용한 낙하>


마지막엔
낙엽도 버틴다.
버티다가 안 되면
버둥거린다.


바람 몇 번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내려오면서도,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으려 한다.


나는 어땠나.
끝까지 나였나.
묻고 싶었다.


낙엽도
떨어질 땐 춤을 춘다.

빙그르 돌다,
몸을 맡기고,
그렇게 바람을 탄다.


떨어지면서도
바닥은 안 본다.


그건 추락이 아니다.
퇴장이다.
조금 길고, 조용한.

존엄은 그렇게 끝에 남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일 나를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