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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자리

양구 백자박물관에서 만난 고양이 동상

by 회색달

정오쯤이었다.

비가 왔가 그쳤다가, 또 내린다.

말 못 할 아쉬움이 남았나,


바닥은 눅눅해졌고

벽 아래 그늘은 하루 종일 마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누웠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하자면,

그냥 이 자리가 좋다.


사람들이 간혹 나를 힐끗 본다.

누워 있는 모습이 좀 요란해 보여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눈으로만 스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때론 가만히 있을 때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으니까.


잠깐씩 들렀다 가는 햇 볕과

조용히 내 옆을 지나는 바람사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 적막과 고요 속.

그때가 바로 정오다.


내게는

가장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고.


끝의 바람,

잿빛 벽면,

신발 자국 눌린 잔디.

이런 것들이 나는 좋다.


복잡하지 않다.

설명도, 줄도, 간판이

없어도 충분하다.


가끔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멈춘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한참을 바라보다 간다.


나는 눈을 감고 있지만

그들이 서 있는 발끝의 방향과

내 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돌아서는 것도 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이 정오를 지킨다.


어쩌면,

내가 박물관의 일부인 줄 아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말을 많이 붙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좋다.

바람, 빛, 젖은 바닥

그리고 멀리서 울리는 발자국 소리.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걸 들으며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다.


고요한 박물관 한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정오.


나는

오늘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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