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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그림자

마음의 휘어지는 자리

by 회색달

소나기가 그쳤다.

비를 들이마신 벽은 아직 식지 않았고

물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담벼락 밑, 민들레 몇 포기.

사람 눈에 잘 닿지 않는 그늘,

햇빛마저 비켜 선 자리에 나는 잠깐 멈춰 섰다.


비에 쫄딱 젖었는데도

얘네는 그냥 서 있었다.


물기 머금은 잎, 축 처진 머리.

그런데도 '꺾였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람 관심 두지 않는 그늘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 작은 몸으로 세상을 향해 조금도 숨지 않고

자신의 모양 그대로 이 구석진 오후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비 맞고 나서, 괜히 혼자 서 있으면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날이 있다.

큰일은 아니었는데 무릎까지 젖고 나면

마음이 조금, 당당해지는 그런 순간.


햇빛이 천천히 돌아오고

벌레 한 마리 벽을 기어오르고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제 속도를 찾았지만

그 민들레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누가 보든 말든, 말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나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젖어도 무너지지 않고,

누가 봐주지 않아도

내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으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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