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렀던 감정들을 쏟아내다

by 회색달

쓸 말이 없진 않았다. 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입에서 맴돌아 노트북 앞에 앉으면 답답했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였다. 생각보다 원망이 앞섰고, 다짐보다는 불평만 가득했다. 내일의 희망을 쓰기엔 오늘 하루가 너무 버거웠다. 나는 늘 감정이 앞서 있는 상태였다. 분노와 억울함, 때론 슬픔과 무기력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올라와 마구 뒤섞였다. 그 모든 걸 견디기 위해 나는 그저 썼다. 형편없는 문장이었고, 일관성도 없었다. 그래도 계속 썼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 하지만 그것만이 나에겐 살아 있다는 증거라 여겼다.


매일 아침과 잠을 자기전 노트북 앞에 의무적으로 앉았다. 어떤 날은 두세 줄을 끄적이다가 덮었고, 어떤 날은A4용지 두쪽을 빼곡히 채우느라 동이 트고 있는걸 본 날도 있다. 일정한 리듬은 없었다. 단지 매일 쓴다는 사실 하나뿐. 어느 한 순간을 지나면서부터 이 반복은 나에게 작은 안정감을 안겨줬다. 누군가와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잘한다'라고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계속’이라는 행위 자체가 위로가 되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억울했다. 가족, 친구, 세상, 그리고 나 자신까지. 왜 나만 이런 꼴이 되어야 하나, 왜 나만 여기까지 떨어져야 하나. 날카롭고 뾰족한 문장들만 쏟아져 나왔다. 혼잣말처럼 써내려간 글들이 때론 나조차 깜짝 놀랄 만큼 독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하나 깨달은 점이 있다.


감정은 체력이 약하다는 것.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고,
슬픔도 매일 쓰다 보니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결국 감정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그 아래 숨어 있던 본질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감정을 쏟아내는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술에 매달렸을까?” 그 물음은 단순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감정이 엉켜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갈망, 외면당할까 두려워했던 마음, 기대를 저버린 자신에 대한 실망. 나는 그 모든 감정을 ‘한 잔’으로 덮으며 살아왔다. 그게 더 쉬웠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했다. 감정을 마주하고, 기록하고, 이해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매일 쓰는 이유였다.


아무리 감정이 날뛰는 날이라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조금은 가라앉았다. 감정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지만, 쓰기 시작하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쓰지 않으면 늘 그 자리에 감정이 버티고 서 있지만, 글로 풀어내면 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를 괴롭히던 기억조차도, 글로 옮기면 무게가 가벼워졌다.


하루는 너무 화가 났고, 또 하루는 이유 없이 서러웠다. 때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쓰기’ 그 자체였다. 감정은 매일 달라졌지만, 나는 쓰기만큼은 매일 동일하게 반복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꾸준함이란 건 결국 매일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인사가 쌓일수록, 나는 한 발자국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자 글쓰기의 패턴도 달라졌다. 처음엔 단순한 감정의 토로였지만, 이제는 감정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되었다. “오늘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무슨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적으며, 나는 내 감정의 언어를 익혀갔다. 그런 글은 나를 치유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한 글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처음 글을 올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나처럼 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누군가 “공감했다”는 댓글을 달아줬고, 그 말 한 줄이 며칠을 버티게 했다. 그들과의 짧은 교류는 내 감정의 경계를 넓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 단순한 깨달음은 꽤 강력했다. 결국 감정은 고립될 때 더 깊어진다. 하지만 공유될 때, 방향을 잃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매일 쓴다. 여전히 감정은 날 흔들지만, 이제는 휘둘리지 않는다.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감정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것이 나를 조금씩 바꾸었다. 쓰면서 나는 싸우지 않고도 감정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아주 조용한 회복이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면, 하나만 기억해도 좋겠다.

“감정이 폭발할 때가 쓰기의 시작이다. 그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그냥 종이에 옮겨라. 잘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쓰면 된다.”


쓰는 행위가 감정을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임을 안 순간, 삶의 방향도 조금 달라졌다. 감정은 지나간다. 하지만 그 감정을 기록한 글은 남는다. 언젠가는, 그 글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쓰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회복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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