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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강연 후기

사랑, 고통, 그리고 시간

by 회색달


9월 중순의 일요일, 초가을의 햇살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도서관 주차장 바람은 선선했고, 햇볕을 받은 은행잎은 아직 여름이었다.

도서관 주변은 주말 오후답게 한산했다. 몇몇 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고 도서관을 드나들었지만, 소란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적막을 가로지르며 시청각실로 향했다.


춘천시립도서관 시청각실, 그곳에서 정호승 시인을 만났다. 시인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담담하고 단정했다. 그의 이야기는 청량리에서 춘천으로 기차를 타고 왔다는 인사말로 시작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흘러갔다. 마치 인생의 여정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사랑의 뿌리는 연민이며, 완성은 모성이라고 했다. 희생과 용서, 인내가 모성을 이루고, 모성은 절대적인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부부와 연인 사이가 자주 깨지고 다투는 이유도 결국 서로 희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사랑이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밥이 되어주는 일상적인 덕’ 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나 사랑은 고통과 함께한다. 고통이 없다면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밟히고 숙성되어야 곡식이 되듯, 인간도 고통 속에서 더 깊어진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고통이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 고통을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시인은 인간이 결국 비극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그 안에서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했다.


고통은 이유를 알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과거는 바뀌지 않고, 미래는 알 수 없다. 결국 오직 지금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사랑도, 고통도, 결국은 ‘지금’이라는 순간을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강연이 끝나고 도서관을 나서자, 오후의 햇살은 더 기울어 있었고 공기는 한층 서늘해져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음속에 세 가지 질문을 품은 채 천천히 걸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내 고통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나는 어떻게 선택하고 있는가?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결국 사랑과 고통과 시간이 함께 엮여 있는 길. 그 길 위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내 삶의 빛깔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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