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했던 시절을 지나, 남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까지

58. 부딪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by 회색달


한때 나는 글을 너무 많이 썼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하나라도 놓치면 나 자신을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문장을 붙잡았다. 그 시절의 글은 늘 방대했고, 끝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글들은 실패도, 미완도 아니었다. 생각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고, 사고가 자라고 있다는 흔적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글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기준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다. 버릴 줄 모른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두가 중요해 보였다는 뜻이다.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한 번쯤 반드시 말이 많아진다. 그 시기를 건너뛴 사람은 나중에 방향없이 무조건 빨라지기 쉽다. 나는 그 시간을 건너뛰지 않았다. 헤맸고, 반복했고, 같은 말을 여러 각도에서 되뇌었다.그건 길을 잃은 시간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글은 점점 짧아졌다. 그건 생각이 얕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깊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 써야 했고, 나중에야 남길 것을 고를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바로 성장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성장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덜 흔들리는 것이다.


기준이 생기면 말은 줄고, 선택은 단단해진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지켜준 건 잘한 선택보다 하지 않은 선택들이었다. 확신해서 한 결정이 아니라, 기준 덕분에 거른 선택들 말이다.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건 자신감도, 성공도 아니다. 오직 기준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고치지 않는다.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해한다. 방대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의 혼란은 낭비가 아니라 지금을 가능하게 한 비용이었다.


나는 더 잘 살기 위해 잠시 서툴렀다. 그리고 지금, 조금 덜 쓰고, 조금 더 정확하게 나의 방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방대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글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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