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때,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by 회색달


이 글의 제목을 정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은퇴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는 말이 괜히 또 하나의 실패담처럼 들릴까 봐.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기다리고, 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은퇴 이후의 삶에서도 늘 시도하는 쪽에 서 있고 싶어 했다는 것. 잘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다음 문제였다.


서른 즈음까지만 해도 은퇴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여겼다. 생각보다 은퇴는 거창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도 아니다.
사소한 하루들이 반복되는 사이, 조금씩 가까워질 뿐이지.


어느 늦은 오후, 타이핑 소리와 전화벨 소리만 들리는 이곳에서 나는 몇 시간째 엑셀 문서 한 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순간 안경 너머 화면이 흐릿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초점을 맞췄지만 작은 칸들은 쉽게 제자리를 찾지 않았다.
‘작년 건강검진 때에도 괜찮았는데….’


의자를 옆으로 돌려 비스듬히 앉았다. 턱을 괴고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날따라 후배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대화 속에는 내가 더 이상 챙겨보지 않는 드라마 제목과 처음 듣는 가수 이름들이 섞여 있었다.
‘업무 시간에 잡담이라니.’ 의자를 돌려 앉아 오른손으로 마우스 휠을 위아래로 굴렸다.


어느 순간부터 사무실에서 나만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경험’이라 불러왔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고집’이나 ‘정체’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몇 년 전부터 사내 희망퇴직자가 늘었다. 다들 이곳이 평생직장이라 여기며 각자의 시간을 쌓아왔을 사람들이었다. 회의 시간에 마주하던 선배 동료들의 자리가 하나둘 비워졌고,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빈자리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언젠간 나도, 그때가 올 테니까.


은퇴(隱退). 숨을 은, 물러날 토니. 단어만 놓고 보면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 비켜난 한 남자가 조용히 사라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영어의 retire는 조금 다르다. ‘다시’를 뜻하는 re와 ‘끌어당기다, 모으다’라는 의미의 tire가 만난 단어다.
멈춤이라기보다 되돌아감에 가깝다. 끝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같은 은퇴라는 말이 한쪽에서는 소멸을,
다른 한쪽에서는 회귀를 말하고 있었다.


영어 단어 하나를 알게 된 이후부터 은퇴는 일을 그만두는 시점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돌아갈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중에 나는 어떤 노인이 되어 있을까” 대신
“지금 나는 어떤 태도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요즘 나는 ‘출판’이라는 문 앞에 서 있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거나 계획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고비마다 넘어지되 무너지지 않기 위해,
쏟아지는 감정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짧고 긴 글들을 매일의 숙제처럼 써왔을 뿐이다.


출판은 은퇴 이후를 대비한 새로운 선택이라기보다
은퇴 전의 내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하나의 과정이었다. 시간을 채워왔던 일의 방향을 바꾸며,
나를 다른 자리로 이끌 수 있을 만한 그런.
그 기록들이 쌓이자 사람들이 나를 작가라 불렀고,
어느새 나는 이곳까지 밀려왔을 뿐이었다. 계획된 성공은 아니었다.


출판사의 거절 메일을 처음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투고 메일을 보낸 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메일함 새로고침 버튼을 반복해서 눌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모두 녹을 때까지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출판시장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책이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다. 골방에서 혼자 쌓아온 하루들을 바깥과 연결하는 일이었다.
먼지가 잔뜩 붙은 이불을 탁탁 털어내는 일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더라도 시간은 남는다. 지금까지의 내가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왔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로.


어른이 된 뒤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순서는 자주 뒤바뀌었다. ‘해야 할 일’이 늘 앞자리에 섰고 ‘하고 싶은 일’은 다음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내가 진짜 좋아했던 게 뭐였지”라는 질문이 자주 따라다녔다.


출판이라는 문 앞에 서 있고 나서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위치에 서게 될지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루를 채우는지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출판은 목표로 설정한 미래라기보다 이미 살아온 방식이 자연스럽게 데려다 놓은 자리였다.


그래서 이 문 앞에서 나는 무작정 안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잠시 멈춰 서서 여기까지 온 나의 방향을 점검 중이다.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예전에 막연히 떠올렸던 가장 이상적인 은퇴의 풍경일지도.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는 아니지만, 돌아갈 자리를 조금씩 마련해두고 있는 상태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문 앞에 선다. 이 자리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을 확인하는 자리다. 나는 오늘도 자리를 지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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