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다

by 회색달


연재 중인 글 한 편의 마침표를 며칠째 찍지 못했다. 어제도 노트북을 열었다가 얼마 못 가 덮어버렸다. 문장 한 줄이 유독 내 마음 높이에 닿지 않았다.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어딘가 어정쩡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이럴 때면 늘 꼬리를 무는 생각이 있다. '역시 나는 꾸준한 사람은 아니구나' 그 끝에 다다르는 마지막 한마디는 늘 "뭐, 어쩔 수 없지"였다. 말은 참 쉽다. 더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이만하면 되었으니 그만하자며 핑계 대기 딱 좋다.


그런데 정말,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 걸까.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이유를 다시 떠올려봤다.

사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지도 않았고, ‘작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여유롭거나 단단한 사람도 아니었다.

2016년, 나는 알코올 중독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며 간신히 하루를 버텼다. 내일을 생각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늘을 무사히 넘기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록뿐이었다.


술병을 내려놓고 펜을 잡았던 그날부터, 나의 문장은 나를 살리는 편지가 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 마시고 싶었지만 참았던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툭 꺼지던 오후까지. 그 모든 순간의 파편들을 밤마다 모았다.

다시 읽어본 그때의 글은 엉망이다. 맞춤법은커녕 중언부언에, 대부분의 내용이 분노와 원망, 자괴감뿐이었으니.


감정은 문장의 거울이라더니, 딱 그만큼이나 날카롭고 딱딱한 문장들뿐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썼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긴 흔적이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내가 하고 있는 게 글쓰기인지, 치료인지,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한 숨 고르기였는지. 다만 분명한 건 버티다 보면 하루가 지나 있었고, 매일 써 내려간 흔적들이 어제의 나를 증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기록은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다. 시가 되기도 하고, 몇 페이지의 수필이 되기도 했다. 쓰다 보니,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오늘의 나에게 전달하는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덜 부끄러운 글을 골라 브런치에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계속된 거절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탈락이 반복되자 익숙한 감정이 올라왔다. 역시나, 어쩔 수 없지.


마지막이라 여기며 도전한 네 번째에서 작가 승인을 받았다. 그날의 기쁨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었다. ‘아, 나 계속 써도 되는구나.’ 딱 그 정도의 안도감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잘 쓰기’가 아니라 ‘계속 쓰기’를 택했다. 이 지겨운 반복을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4년, 100일 쓰기를 시작했다. 증명이 아닌 다짐이었다. 이번에도 백 번의 마침표 중 마음에 쏙 드는 글은 없었다. 분량 채우기에 급급한 날도 있었고, 졸음을 참으며 쓴 탓에 나중에 읽어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만 나열된 글도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100번째 글을 마쳤을 때 내 손에 남은 건 완벽한 작품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쓰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어쩔 수 없다'는 절망과 '어쩌다 보니'라는 기적 사이, 그곳엔 800개의 마침표가 있었고 2026년, 글은 900편에 가까워지고 있다.

여전히 의욕 넘치는 글보다 회색빛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매일 써본 사람은 안다. 쓰지 못할 이유는 100개도 찾을 수 있지만, 그걸 반복하니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었다는 걸.

미완성인 글을 그대로 두어도 시간은 흘렀다. 대신 그만큼 문장이 쌓였다. 먼지가 내려앉듯, 나무의 나이테가 생기듯 기록은 조용히 나를 바꾸고 있었다.


매일 아침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세상엔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다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의 문장을 읽고 짧은 소감을 적으며 나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하지만 예전처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덮어버리지 않는다. 이미 나는 그 시간을 두 번이나 통과해 본 사람이니까.


‘작가님!’

공저 출간과 잡지사의 칼럼 몇 편이 전부인 내게 여전히 낯선 호칭이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다.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써왔을 뿐이고, 살아남기 위해 기록했을 뿐이다.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다. 꿈은 도달해야 할 도착지가 아니라, 오늘 내가 멈추지 않고 하고 있는 '행동' 그 자체였다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어쩌다 보니 작가라는 꿈을 살고 있는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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