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서울 지하철 2호선 의자에 올랐다. 시계는 6시를 갓 넘겼을 뿐인데, 내가 있는 칸은 벌써 자신만의 삶을 짊어진 사람들로 빼곡했다.
무채색 새벽 공기를 가르고 달려온 삶이 모여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각자의 세계에서 나온 이들은 한 칸에 모여 있지만, 시선은 모두 저마다의 작은 창으로 향해 있었다. 파랗고 노란, 때로는 흰색 스마트폰 화면이 잠이 덜 깬 아침의 어둠 속 얼굴들을 한 뼘씩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는 뉴스 기사를 훑고, 누군가는 어제 끊겼던 드라마를 이어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그들의 표정은 다양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하나같은 피곤함이 한가득이다. 갓 출근하는 신입사원의 팽팽한 긴장감, 오랜 세월 삶의 무게에 눌린 중년의 고단함,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찡그린 얼굴까지. 이 지하철 한 칸은 마치 거대한 도시의 축소판 같았고, 숨 막히는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집단적인 초상화 같기도 했다.
이들의 어깨와 어깨 사이에서, 흔들리는 열차의 진동과 함께 나 또한 한 명의 승객으로 서 있는 중이다. 며칠째 이어지는 출장길. 강의 준비, 낯선 얼굴들과의 미팅. 하나같이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들이다.
서른 즈음, 나는 번아웃의 깊은 늪에 있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의 압박. 개인적인 삶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땐 무엇이든 기대야 했다. 주로 술이었다. 스마트폰 게임이나 무의미한 쇼핑, 때로는 피상적인 인간관계도 그 대상이 됐다. '의존증'이라는 단어. 그 시절의 나를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었다. 스스로 설 힘이 없었고,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순간적인 위로만을 찾았다. 고통은 달콤한 위로를 가장한 중독의 구렁텅이로 나를 이끌었다. 그 안에서 헤어 나올 힘마저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건 그런 시절의 막바지였다. 처음에는 그저 푸념을 끄적이는 것에 불과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활자로 옮겼다. 내 안의 덩어리들을 조금씩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그 조각들이 쌓여 글이 되고, 언젠가는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어둠 속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다. 그것은 손쉽게 얻던 위로와는 달랐다. 긴 시간과 지난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미의 가치를 조금씩 깨달았다.
지금, 서울 출장 중인 나는 과거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이른 시간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어깨에는 늘 무거운 짐이 놓여 있다.
이번 강의 주제는 '도박과 중중독이다. 내가 지나온 길과 겹치는 대목이 많아 준비 과정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도파민 중독, 알코올 중독, 혹은 일 중독, 쇼핑 중독. 인간관계까지도. 이 모든 중독의 근원에는 독립적이지 못한 '나'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했던 마음도 한몫했다. 불편함을 피하고자 순간의 쾌락을 좇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출장이 끝나면 다시 숨 가쁜 일상이 기다릴 것이다. 며칠 자리를 비운 탓에 밀린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일 테고,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 육체는 다시 천근만근 무거워질 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술이 없어도, 그 어떤 순간적인 쾌락에 의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오히려 더 바쁘고 힘든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형태를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얻는 작은 성취감.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지하철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떠오르는 글감 한 조각. 복잡한 서류 더미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마침표를 찍어내는 순간. 이 모든 작은 점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조금씩 쌓아 올리고 있다는 진실을.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여전히 불안하고, 때로는 지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내딛으려는 나의 의지. 바로 그 의지가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독립적이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넘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가 조금씩 피어나는 중이다.
오늘도 피곤에 절어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기댄다. 더 이상 허무하지는 않다. 힘들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살았고, 그 하루가 쌓여 나의 단단한 일상이 되고 있다는 확신. 술 없이도, 거창한 위로 없이도, 나는 나 자신으로서 충분히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 무덤덤하고 담백하게, 그렇게 나의 오늘은 흘러간다.
그리고 내일도, 나는 이 행복의 그림자를 쫓아한 발짝 더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