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직장에 발을 디딘 지 열 해가 되던 어느 해, 어렵게 잡은 자리를 잊어서였을까. 하고 있는 일에 점점 깊어지는 회의가 밀려왔다.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지만, 그런 속마음을 가족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혼자 버티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조차 속내를 보이지 못해, 힘든 기색마저 감추고 살았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으니 모든 무게는 내가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늦은 밤 퇴근해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처음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며칠째 감사 업무가 이어지는 시기라 최선을 다했음에도 마음은 공허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고, 여느 때처럼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세상살이는 생각보다 버거웠다. 마음속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내 안은 금세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 공허를 메우려 붙잡은 것이 술이었다. 처음에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작은 위안이었다. 몸을 지치게 하고 정신을 잠시 흐리게 만들어 현실을 잊게 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은 나를 갉아먹으며 삶 전체를 잠식했다. 어느새 술이 없으면 잠들 수도, 하루를 견딜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잠깐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지만, 아침이 되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숙취와 함께 찾아오는 자책감은 나를 더 깊은 늪으로 끌어내렸다. ‘나는 변하지 못한다’는 체념이 내 안에 뿌리내렸다. 세상도, 나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알코올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 내 존재 전체를 옥죄는 쇠사슬이 되었고, 나는 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 밤, 술잔을 내려놓고 텅 빈 거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침묵 속에서 불안과 후회, 자책감이 뒤엉켜 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순간, 나를 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듯했다.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마음 한켠이 뜨겁게 데였다. 그동안 외면하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 평소처럼 켜둔 라디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존 레논의 〈Imagine〉이었다. 늘 배경음처럼 들려오던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가사가 이상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만약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면, 만약 모두가 함께 살아간다면?”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몽상처럼 들렸지만, 곧 노래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서 있을지를 묻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술이라는 경계 안에 갇혀 있었고, 그 안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는 속삭였다. ‘너도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만약 내가 술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한다면?’ ‘지금의 고통 너머에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면?’ 그 질문은 희미했지만 씨앗처럼 내 안에 심어졌다. 나는 여전히 술에 흔들렸고, 수없이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상상이 가능해졌다는 것 자체가 태도의 변화를 뜻했다. 희망은 거대한 기적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보겠다’는 작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Imagine〉은 이상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갈등과 분열이 없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겠지만, 그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나 또한 그 세상을 함께 그려보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은 현실 속의 나를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절망 대신 희망을, 회피 대신 용기를, 무력감 대신 작은 움직임을 택하게 한다.
나는 여전히 중독의 흔적을 안고 산다. 술을 완전히 끊는 일은 쉽지 않았고, 지금도 내 안에는 유혹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그림자를 부끄러움만으로 보지 않는다. 퀘퀘묵은 먼지도 바람에 날려 구석에 쌓이면 단단히 굳듯이, 내 삶을 스친 ‘중독’이라는 흙먼지도 단순히 오점으로만 남기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다음 계단을 오르기 전, 잠시 숨 고르고 밟고 서기 위한 바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속 흙먼지를 쓸어 모은다. 중독은 내 인생의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그 먼지가 나를 무겁게 하지만, 동시에 내가 서 있는 바닥이 된다. 그 바닥 위에서 나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언젠가 이 고백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누군가가 자신의 먼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새로운 계단으로 삼기를 바란다.
〈Imagine〉은 내게 상상의 힘을 일깨워 준 노래다. 상상은 현실을 당장 바꾸지 못하지만, 태도를 바꾼다. 태도가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안다. 희망을 상상하는 순간, 절망 속에서도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그 믿음이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언젠가는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삶에도 닿기를 조용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