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힘드셨습니까.”
상담실의 공기는 조용했다. 대기실에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그동안 쌓아둔 말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의자에 기대자 말들이 흩어졌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만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바닥에는 땀이 고였다.
“그냥… 계속 버텼습니다.”
짧은 한마디. 그러나 그 안에는 십 년이 들어 있었다. 승진에서 밀리던 해 들, 점심 자리에서 웃어야 할 순간을 재던 시간, 축하의 박수 속에서 물컵을 들고 시선을 피하던 저녁들,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오후. 회의실 유리문에 비친 내 표정은 늘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 표정을 오래 유지하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었다.
의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애쓰셨네요.”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지금 까지 내가 해온 기록 같았다. 마치 그 시간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결과를 묻지 않고, 시간을 먼저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열 번째 탈락이 있던 날, 사무실은 들떠 있었다. 발표 메일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모두가 모니터를 자주 확인했다.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메일을 열었다. 명단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한 줄 한 줄 읽었다. 끝까지 내려갔다. 이름은 없었다. 다시 위로 올려 확인했다. 혹시 놓쳤을까 봐. 없었다.
옆자리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가는 전화를 받았고,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나는 박수를 쳤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입꼬리를 올리는 근육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에게 보낸 메시지는 그것뿐이었다. 한참 뒤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수고했다.”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합격 여부를 묻지 않는 답장이었다. 대신 시간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열한 번째 탈락의 밤,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사직서를 꺼냈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이름을 적으면 끝이 날 것 같았다.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이름 세 글자를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결국 종이는 다시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도 출근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로그인 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특별한 사건 없이, 그냥 하루가 또 쌓였다.
열두 번째에야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사람들은 축하했고, 명함의 글씨가 바뀌었다. 직급이 적힌 새로운 명함을 손에 쥐었을 때, 종이의 두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발표 메일을 열 때마다 숨을 죽이던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명단을 끝까지 내려보는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는 평가표를 넘기는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치고, 메모를 남긴다. ‘보류’라는 단어 앞에서 손이 멈춘 적이 있다. 그 칸에 누군가의 십 년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해의 얼굴들이 겹쳐졌다. 박수를 치면서도 시선을 내리깔던 사람들. 그 장면을 알고 나서는 판단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마지막 병원문을 나선 날, 하나를 다짐했다.' 이 시간을 그냥 지나가게 두지 말자. 누군가가 보지 않아도, 적어도 나는 기록해 두자.'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첫 원고를 올리던 밤, 노트북 화면이 유난히 밝았다. ‘발행’ 버튼은 작았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이미 여러 번 고친 글이었는데도 다시 읽으면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제목을 바꿨다가 되돌렸고, 문단을 나눴다가 합쳤다. 쉼표 하나에도 오래 머물렀다. 임시저장 시간만 늘어갔다. 결국 늦은 밤이 되어서야 버튼을 눌렀다.
발행.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면만 조용히 바뀌었다. 조회 수 1. 아마 나였을 것이다. 괜히 새로고침을 눌렀다. 2. 잠시 뒤 3. 숫자는 느리게 올라갔다. 세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가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화면의 속도를 상상해 보았다. 지하철 안일 수도 있고, 침대에 누운 채일 수도 있고, 점심시간의 사무실일 수도 있다.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휴대폰을 옆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다.
기다림은 익숙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숫자를 기다렸다. 다만 그때는 합격 여부였고, 지금은 문장의 도착 여부였다. 명단 대신 문장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떨어진 해의 숫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문장의 속도를 정했다. 오래 버텼던 만큼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되었고, 오래 기다렸던 만큼 서두르지 않게 되었다. 무너졌던 밤들이 있었기에, 누군가의 침묵을 오래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글은 성취의 증명이라기보다 시간의 축적에 가까웠다. 승진이 직급을 바꿨다면, 쓰기는 호흡을 바꾸었다. 결과를 향해 달리던 시선이, 과정을 돌아보는 쪽으로 조금 이동했다.
돌아보면 병원에서 꺼낸 한 말 한마디 덕분에 여기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단지 버텼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이 지금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버티기 위해 쓰지 않는다. 하루가 그냥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 쓴다. 증명해야 할 대상은 점점 줄어들었고, 대신 남기고 싶은 장면들이 늘어났다. 기록은 결국 나를 다시 읽게 한다는 것을, 여러 번의 밤이 알려주었다.
명단을 확인하던 손으로 오늘은 문장을 고른다. 승진을 기다리던 마음으로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이름을 찾던 눈으로, 이제는 의미를 찾는다. 페이지를 넘긴다. 한 번 넘겼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음 장에도 여전히 평범한 하루가 적힐 것이다. 출근하고, 일하고, 누군가를 평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 그 사이에 몇 줄을 더 적는다.
그렇게 두 번째 장이 이어진다.
새로운 인생, 두 번째 챕터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