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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Apr 11. 2024

31.쓰면 이루어 진다.

‘비 내리는 날, 남들은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더라도 작가는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들어 비를 맞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산 대신 손에는 펜을 들어 지금 드는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오로지 글쓰기 하나로 나를 가르쳐주신 인생 스승님의 말이다. 한참을 방황하던 16년도의 여름. 그때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퇴근 후 특별히 이렇다 할 거리가 없으니 오늘도 술 약속을 이행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미 마음은 술 앞에 앉아 있다. 밀리는 차 사이로 이리저리 피해가려는데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밀리는 차들 사이에서 내 발도 그렇게 묶여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억이 없다. 아니, 기억을 못 한다. 눈을 떠보니 자동차 핸들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목이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등은 누가 방망이로 세게 후려친 느낌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간신히 들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경위는 이랬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차들을 제일 뒤에 따라오던 차량이 그대로 박아 버린 것. 하필 나는 다른 차들 사이에 정차 중이었는데 그 충격으로 인해 앞뒤가 그대로 받혔다. 충격 때문에 아주 잠깐이지만 의식을 잃었다.


‘사람이 살면서 죽을 뻔한 일이 몇 번씩 찾아온다는데, 나는 이번 경험까지 세어보면…….; 참, 많네…….'


 다섯 살 때였을 거다. 충북 충주 시골에 살면서 당시 축사에서 키우는 소들의 분뇨가 모이는 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인데도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 저 멀리 아버지께 달려가다가 그냥 물이 고여 있는 줄만 알았다. 왜 그런 적 있지 않은가. 한 참 비가 내린 오후엔 작은 빗물이 모여 작은 웅덩이가 생기는 그런 곳. 한 발을 내디뎠다.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리고는 어두운 무언가가 나를 삼켰다. 다행히 수면으로 희미하게나마 빛이 흘러들어와 그곳을 향해 기어 올라왔다.


 초등학교 2학년. 열 살 때는 자동차에 치여 보름 정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아산시에 있는 새우젓 가게에 들른 날이었다. 당시에는 부모님께서 순대국밥 장사를 막 시작한 때여서 김치를 직접 담가 손님에게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양념으로 쓰이는 새우젓 하니만큼은 직접 눈으로 보고 골라 사용하겠다는 부모님이었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 시내에서 한참을 차로 이동했지만 오래 걸렸다. 길이 구불구불했다. 갓길에 잠시 정차시키고 ‘잠깐 차 안에서 기다려’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곧이 그대로 들으면 내가 아니다. 호기심이 화를 불렀다. 부모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분명히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뛰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동차에 치였다. 반대편 구부러진 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운전한 사람의 말로는 부딪히자마자 공중에 붕 떠 몇십 미터를 날아갔다고 했다. 그때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늘과 땅이 번갈아 가며 눈에 들어왔다. 천만다행으로 머리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합기도를 다니고 있었던 덕분이었을까, 배운 낙법을 기가 막히게 했었을 거다. 시골에서 일어난 사고라 119를 부를 겨를도 없었다. 문밖에서 난 큰소리에 부모님께서 달려 나오는 모습이 기억난다. 정밀검사를 했지만, 특별히 부러진 곳도, 출혈도 없었다.


그 외에도 시골 큰 고모 댁에 놀러 가 나무에 줄을 매달아 놓고 매달렸는데 그대로 떨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친 적도 있다. 중학교 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자동차를 피하지 못해 그대로 깔린 적도 있고. 그땐 겁이 나, 연락처와 자전거만 자동차 주인에게 맡기고 얼른 학교로 갔다. 지각, 결석, 조퇴라는 단어는 부모님께 용납되지 않았던 때였다. 뒤늦게 가게로 가해자가 찾아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알려 오히려 더 혼났다. 그걸 왜 말 안 했느냐고. 살다 보면 아무리 내가 사고를 피하려 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하하하'     


 5중 추돌 사고. 통원치료로 몇 주 병원에 다녔다.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른 초반의 나이, 이대로 무언가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내 젊음이 아깝다.'라는 생각. 그리고 떠오르는 질문 하나.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이전까지는 '뭐, 사람이 태어나 사는 대로 사는 거지' 했다면, '앞으로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야겠다'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말이 쉽지, 태어나서 이런 진지한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디서 부 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을 방황했다. 여행도 떠나보고 종교의 힘을 빌려 해답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유명하다는 절에도 가서 ‘템플스테이’ 에 참석까지 했다.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 억지로 답을 찾으려 해서일까, 뻥 뚫린 바다 앞에 서 있는데도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안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제가요. 수십억의 빚이 있습니다. 저는 불치병 환자입니다. 저는 장애를 각지고 있고, 정신병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노가다 판을 전전하다가 결국 교도소에 갇히는 범죄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 쓰기 강의를 한다고 하면서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제 인생이 변했을까요?. 궁금하시죠?. 제 수업을 다 들으시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서울 유명 유명강사의 글쓰기 수업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가 겪은 일을 손으로 이야기하는 걸 밥 먹듯 해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작가가 있다고 해서 찾아온 자이어트 골든 클래스. 이은대 스승님과 만난 첫 시간의 인사말이었다. 그를 알게 된 건 우연히 시청하게 된 유튜브 영상에서였다.


 50이 넘은 나이. 공사장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사는 인생. 그를 표현하는 문장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변했다. 아니, 다시 태어났다는 표현이 맞다. 지금은 수백, 수천 명의 문하생이 그의 강의를 듣고 있으니까.


 막무가내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변하는 걸 보고 '죽을 때가 되었나'라고 한다던데, 내가 보기에 이은대 작가는 적어도 몇 번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 사업 실패로 수십억의 빛을 떠안게 되었었음에도 모든 걸 이겨내고 꿋꿋하게 서 있는 자신을 보라는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과거에 이 사람이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고 하면 누구라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 한복판의 지하에 마련된 임시 강의장에서 만난 이은대 작가는 그날 이후로 내 인생 스승이 되었다. 지금껏 방황하던 네 인생, 내가 옆에서 일러 줄 테니 다시 한번 일어나 보라고 길을 알려주겠다는 그의 말에 용기 내 시작한 일. 바로 책 쓰기다. 웃긴 건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음에도 초고는 아직도 출판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계속된 거절.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라는 반려 메일이라도 오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가볍다. 아예 답장도 없는 출판사가 더 많다.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털어놓을 곳이 없어 퇴근 후에는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손에든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 쇼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책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책 쓰기를 하더니 아예 삶이 바뀌어 버렸다. 어디를 가도 늘 책이 함께였다. 화장실에도 책이 있었고 침대, 거실, 차 뒷좌석에도 늘 책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책을 들고 다니는 나를 보며 의아해했다. ‘무슨 책을 읽냐’ ‘네가 무슨 글을 쓴다고 그러냐’ 식의 눈치를 줬다. 그건 핀잔이었다. 지금껏 내 삶을 내가 형편없이 살아왔으니 남들도 그렇게 볼 수밖에.


 그럴수록 더 읽고 썼다. 출퇴근 시에는 월간잡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고 때때로는 출장을 나가는 길에 옆좌석에 올려두기도 했다. 휴식 때면 읽어볼 요량이었다. 그때 한 몸처럼 같이 움직이던 책이 "좋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4년 넘도록, 매달 바뀌는 얼굴이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 사이처럼 낯설지가 않다.


 그런 녀석과 더 친해지고 싶어 속 이야기를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꽃을 빗대 시를 써 보기도 하고 지난 일을 기억하며 수필도 써가며 내 곁으로 더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끈질긴 덕분이었을까?, 드디어 회신이 도착했다. 늘 가방에 넣고 다니며 내 보통의 일기를 적어 보냈는데 마침내 내 사연이 실린 것이었다.

문자 메시지 제일 위에 써있던 문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좋은 생각 편집부입니다.’


 겨우 지면의 한구석에 무슨 호들갑이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마치 짝사랑을 하던 여인에게 선물 공세를 하다가 드디어 답장을 받은 기분이다. 조금 더 알아가자는 정도의 대답. 어떻게 보면 내 삶을 더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생각났다. 작가의 의무란 어떤 상황에서든 써야 한다는 걸. 내가 쓴 책이 걸레 취급을 당해도 다시 쓰는 사람이 작가다. 나는 작가를 꿈꾸지 않았는가, 내 삶을 다시 써보자고 다짐하던 내 인생 작가. 창조주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정말 내가 생각한 이 길이 당신이 예정하신 것이냐며.


 그 뒤로도 쓰기를 쉬지 않았다. 아니 범위를 넓혀 읽고 쓰기의 매력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작가로서 또 하나의 소명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시간마다 스승님의 늘 말씀 하시는 문장이 있다.


 ‘남을 위한 글을 쓰려고 해보세요. 내가 쓰고 덮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때로는 어깨를, 휴지를 건네어 줄 수 있는 그런 글. 그럼 자연스럽게 글쓰기 실력이 늘어갈 겁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펜을 들어 하고 싶은 일을 적어놓은 것 말고는 없는데 거짓말처럼 하나둘 이루어져는 중이다. 아니 더 많이, 크게.


 23년 8월호에 내 글이 실려 나에게 왔다. 사진 한 장을 찍어 일기장에 기록해뒀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창피했다. 내가 아직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니라서, 부족하기만 한 내가 이런 과분한 영광을 누린다는 게 남들에게는 안줏거리로 전락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다. 이럴 땐 세상 사람 전부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편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사실 글쓰기 역시 그런 의미로 시작한 것이었고.


한 줄, 두 줄 쓰다보니 하나 둘 이룬 것이 많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스승님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덕분이다. 내일은 또 어떤 내 삶의 기적이 일어날까? 기대되는 밤이다. 오늘의 마침표를 찍어야겠다.




23.6.13.오후 다섯시 오십사분의 여락을 받고 기록한 일기 18:41 . 당시 청년이야기 대상을 도전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을 쓰고 지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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