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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볶음 김밥 소울푸드 이야기

어제의 눈물이 오늘의 환희로

by 회색달

1980년도 초반, 한 참 유행하던 노래가 하나 있다. 김창환 가수의 '어머니와 고등어'다. 경쾌한 느낌의 기타 연주와 함께 들리는 가사를 듣고 있으면 어머니의 아들 사랑, 아들의 어머니사랑이 느껴진다.

다음날 일찍 출근하는 아들의 아침밥 준비를 위해 고등어 한 마리를 소금에 절여 냉장고 안에 넣어두신 어머니, 그 고등어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 아들은 냉장고 문 여는 소리에 어머니 잠을 깨울까 조심한다.

가사 중에서 '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좋은 걸.' 소절만 들어 봐도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느껴진다. 흔한 생선 한 마리로 '사랑'을 그려낸 걸 보면서 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는다.


열 살 때까지 경기도 평택시 시골 국민학교의 분교를 다녔다. 2000년도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칭이 국민학교였다. 밀레니엄시대에 들어오면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쓰이던 잔존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명칭이 바뀌었어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시골 논길을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한 시간 넘도록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에 도시락 반찬은 거의 매일 똑같았다. 김치, 김, 멸치볶음 외에 수시로 바뀌는 나물 무침. 가끔 손가락 만한 계란말이가 몇 개 있으면 아침 등굣길이 신이 났다.

네모모양의 각진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기다란 원통 모양의 도시락 가방을 한 쪽어깨에서 반대쪽 허리 방향 사선으로 메었다. 신발주머니까지 들고 집을 나서면 학교 갈 준비는 끝난다.


늦잠을 잤다. 걸어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침 비도 내리는 덕분에 일터에 나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화물차의 옆 자리를 탈 수 있었다.삼십 분 남짓 달려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데 한쪽 어깨가 허전했다. 있어야 할 도시락 가방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괜찮다. 점심시간 전에 엄마 편으로 가져다줄게' 하고는 차를 돌리셨다.


"똑똑"

복도 창문으로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다. 아침에 깜빡하고 놓고 온 도시락 가방을 가져다주셨다. 때마침 그날은 학부모회에서 주 몇 회 있는 학교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복도까지 나가 도시락을 받아다 주셨다. 반가움보다 괜한 창피함이 더 컸다.

책상 2개를 앞 뒤로 붙여 4인 식탁을 만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모양도 색깔도 다른 도시락 통이 모였다. 반찬 뚜껑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입에서는 '우와~' 하는 탄식이 들렸다. 내 차례가 되어 뚜껑을 열었다. 멸치, 콩자반, 김치, 다시마 부각. '에이~' 실망하는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이면 내 옆에 있던 진배의 도시락 반찬은 소시지 볶음이어서 그랬는지 내 도시락 반찬이 창피했다.

소풍날에는 보통 엄마손으로 직접 김밥을 싸주셨다. 오전에 이곳저곳을 구경 다니다가 점심시간에 다 같이 그늘에 앉아 서로의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모은다. 오늘의 주인공은 역시나 진배다. 치킨을 싸왔다. 그것도 양념치킨이다. 2단 도시락 반찬통에 밑에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나나까지 있었다.

'나 하나만 먹어도 돼?' 그 말이 왜 그렇게 창피했는지 어물쩡거리다가 남들 먹는 통에 나도 슬쩍 하나 집었다.

지금 같으면 한 다발을 사다가 앉은자리에서 다 먹을 수 있는데, 그땐 한 송이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가끔 공사장에서 일용직을 하시는 아빠의 퇴근에 '아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라는 전화에 내 대답은 언제나 '바나나'였을 정도였으니까. 어른이 된 지금도 좋아하는 과일을 꼽으라면 바나나다.

나에게 치킨은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맛이다. 몇 년 전부터 '옛날치킨'이라고 불리는 맛. 매달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먹을 수 있었다. 기름에 튀긴 닭 한 마리가 신문지를 접어 만든 봉투에 통째로 담겨있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닭 껍질에 신문이 녹아 붙어 있기도 했다. 나는 그걸 보지 못하고 씹었다가 뱉은 적도 있고.

신문지를 길게 찢어 웅크리고 있는 닭을 분해한다. 닭 발과 날개, 목 뼈는 늘 엄마의 몫이다. 양다리는 아빠와 내 접시 위에 놓였다. 따로 거실 없이 문을 사이에 두고 방 두 개가 붙어 있는 한옥 집이라 온 방에 고소한 치킨 냄새가 가득 찼다.

닭은 손으로 잡고 뜯어야 제맛이다. 젓가락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면 뼈 사이에 붙어있는 작은 고기기 조각을 놓치기 쉽다. 도중에 씹히는 작은 뼈 조각은 튼튼한 이빨로 씹어 먹으면 그만이다.


어른이 된 내가 고향을 떠나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동안 월급 받는 날마다 부모님께 치킨값이라며 돈을 조금 입금 해드렸다. '네가 무슨 돈을 번다고 보내냐. 아들이나 밥 잘 챙겨 먹어라' 하며 몇 만 원을 더해 다시 입금해 주셨는데, 옛날 치킨'이라는 그 맛이 생각나 먹으면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아 그때 아버지처럼 소주 한잔에 닭다리 한 입을 뜯었다.

며칠 전 퇴근길에 집 근처 김밥 가게에 들렀다. 벽에 커다랗게 걸린 메뉴 판을 보니, 김밥 종류가 많았다. 야채김밥, 치즈김밥, 참치김밥, 돈가스 김밥, 삼겹살 김밥, 등 등 수 십 가지 반찬을 가져다 넣어놨다. 그중 볶음 멸치 김밥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한 줄가격에 4000원. 무슨 맛일까 궁금해 한 줄을 시켰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식탁 맞은편으로 방금 내가 주문한 음식이 재빠르게 준비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얇은 김 한 장을 도마 위에 올려 펴놓고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밥을 한 주걱 퍼 위에 올렸다. 곧이어 단무지, 당근 외에도 녹색 야채가 열을 맞춰 누웠고 빨갛게 양념된 멸치가 무리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동그랗게 말려서는 몇 번의 칼 질에 검은색 겉옷을 입은 열개의 동그란 무늬가 흰색 접시 위에 생겼다.

젓가락으로 김밥 꼬다리를 집어 들었다. 단면으로 잘린 곳은 양념이 가득인데, 반대쪽은 김밥 속이 넘쳤다. 소금에 양념된 흰 밥에 야채 맛만 났다. 김밥은 머리와 꼬리가 맛있다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부족한 형편에 어떻게든 살림을 꾸렸던 안사람의 무게. '나도 멸치 말고 분홍소시지에 계란 싸줘. 아니면 밥 안 먹어'라고 투정 부렸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늘 그런 존재였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술주정을 부리는 아버지의 폭언에도, 반찬 투정하는 아들에게도 늘 미안해하는 사람. 옛날 통닭 한 마리를 가족이 모여 먹어도 목 뼈, 날개에 불은 살 발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사람. 어머니가 노래를 잘하시는 비결이 목 뼈를 많이 드셔서 그런 줄만 알았다. 지금은 안다. 어머니라서, 해야 할 일이었다는 걸, 사랑 이었다는 걸. 멸치가 굵다.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삼키기 힘들다. 찬 물 한잔 마셔야겠다. 앞으로는 남기지 않고 다 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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