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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an 26. 2024

아버지의 독서

내가 글 을 쓰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의 꿈은 원래 작가였단다. 기억 속 어릴 적 만해도 집안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도 남아 일부는 안 방까지 책을 쌓아놓은 걸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다만 읽기에는 배움이 필요 없지만 쓰기는 다르다. 더군다나 위로 누이 여섯, 홀 어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까지 더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

 지금은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애지중지 정 붙인 책을 주변에 나누어 주거나 기증하면서 양이 많이 줄었다지만 아직도 거실의 반은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다. 가끔 아버지 댁을 들를 때마다 느끼는 건, 아파트 거실에 그 흔한 티브이 한 대 없으면 허전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기분은 들지 않는다는 거다.

 고등학교 때였다. 어머니께서 당시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고 싶은 마음에 티브이를 말없이 샀다가 집 안이 시끄러웠는데, 그나마 있었던 티브이가 십 년 도 더 된 거라고 큰소리치는 어머니 덕분에, 나도 티브이 덕을 좀 봤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뚱뚱이 티브이를 보냐고요. 보기에도 좋고 성능 좋은 날씬이 산 게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벽으로 엉덩이를 내 빼고는 자리 차지하던, 공장 생산에서 나온 일자가 십 년도 더 된 티브였으니 아버지께서도 이렇다 할 반박을 못 할 수밖에. 그런 아버지도 시간이 지나자 현대 문물의 맛을 알아가셨다. 거실에서 늦게까지 올림픽 경기, 월드컵 축구를 몰래 볼 때면 궁금하셨는지 나와서는 '바보상자 앞에서 연예인 보며 웃고 있을 시간에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어봐라.' 하면서도 슬쩍 내 옆에 앉아 이름도 모르는 외국 축구 선수를 응원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집 근처 학원 통학버스를 밤늦게까지 운행하는 기사역할을 했는데 가끔 아버지를 도와 세차할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운전석과 그 옆으로 쌓여있는 책을 꺼내는 건 늘 당신 몫이었다.

 옆에서 손을 거들어 무슨 책이 있는지 봤는데 종류도 다양했다. 신문, 한 문으로 쓰여있는 책, 소설, 시집 등 등. 가장의 역할을 다하다 보니 포기한 학업의 욕심을 읽기에라도 푸는 셈인지 아니면 아직도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60 평생 살아오면서 아직 이르지 못한 반열에 자신도 발을 디뎌 보고 싶은 것. 사람 욕심이 무섭다. 그 뒤로도 계속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으시더니 결국은 지역 신문에 기고한 글이 실렸다. 그걸 온 동네 친 인척에게 자랑하시느라 며칠 을 웃고 계셨는데, 혹시나 신문이 상할까 봐 유리 액자까지 만들어 보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 선택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땐 '너의 인생이다, 너 마음대로 살아라. 그게 제일이다.'라며 별 말 없으셨지만 당시만 해도 아버지께서 벌인 사업이 두 번이나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취업에 연계된 곳으로 우선 선택했다.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글 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느냐 라는 권유가 있었다. 기억으로 따지자면 거의 30년 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교실 수업에서 책상을 4 분단으로 나누어 앉았는데, 나는 1 분단 맨 앞자리였다. 자연히 담임 선생님 책상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숙제로 내야 하는 일기를 꼼꼼히 읽어 준 기억이 난다. 그중 하루는 시를 적어 놓았는데 제목이 '아버지'였다.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다가 진지하게 다시 읽어봤단다. 그 내용이 웃어넘기지는 못하겠다고.

 밤늦게 이사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다. 당시 의료기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한 한 가정의 결과였다. 그 뒤로 공사장 일을 하면서 버텼고 그때가 내가 막 초등학교 입학 할 때였다. 거의 매일 밤늦은 시간의 귀가, 다시 새벽이슬을 맞으며 걸어 나가는 한 남자. 그 시를 어른이 된 내가 3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각색했고 3년 전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제출했다가 입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아버지께 문자로 보내드렸는데, 그날 밤 어머니의 전화 한 통으로 나는 다시 30년 전의 울보 꼬마가 됐다.

 '밤에 한 참을 우시더라.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누구나 힘든 기억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시련도 다 글 감이 되는구나 싶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나도 불합격과 실패가 많았다. 처음 결혼을 하고 난 뒤 얼마 안 가 이혼을 했다. 일 년이 채 안 됐다. 처음 신혼집전세 계약 하고 나서 다음 계약을 하기도 전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부모님께 사실을 말해야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눈치를 채셨는지 전화를 해서는 '됐다. 밥 잘 챙겨 먹어라.' 말만하고 끊었는데 그 뒤로 몇 개월을 술에 빠져 살았다. 누구보다 잘 살아내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이혼 후 내 눈에 비치는 세상 사람 모두가 나만 빼놓고 행복해 보였다. 퇴근 후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무리 술에 의지해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기에 치료센터를 다니면서 대체 방법을 추천받았다.

"운동도 좋고 독서, 여행 그 어떤 것도 좋으니 관심을 돌려보는 게 어떨까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아예 술자리를 참석하지 않기 위해 두문불출할 방법을 고민했고 밤 열 시까지는 도서관, 그 이후에는 독서실에서 쪽 잠을 잤다. 중독 치료를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 기간 동안 써놓은 글 이 잡지사에 실렸다. 집중의 반복으로 습관을 고치는 힘이라는 주제의 글. '스몰스텝의 전략.' 로버트 마우어라는 작가의 아주 작은 반복의 힘에서 영감을 얻은 쓴 내용이었다.


 솔직히 내 글이 실릴 줄은 몰랐고 그걸 또 내 지인이 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말은 같았다. '고생했다.'의 위로와 응원의 말, 사람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달라졌다. 짜증과 비난, 우울함 대신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읽기와 쓰기를 계속하고 싶었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차라리 지금에 와서라도 발을 들였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불혹이라는 나이 마흔에 들어서기 전에 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실패를 모두 겪고 난 뒤에는 '미혹되지 아니하다는 나이를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멀리 돌아왔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직접 겪은 실패담이 더 좋은 글 감이 된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앞으로도 성공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계속되리라.

 기억 속 독서에 빠져있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난 나는 요즘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마다 독서실 행이다. 주변에서 '시험공부라도 하느냐'라는 질문이 있을 때마다 '책 읽으러 갑니다'라는 대답을 한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책이야 말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알려주는 기출문제집 인셈이다. 가끔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작가 사인회와 강연 참석은 시험을 더 잘 보기 위한 핵심강의 정도랄까.

 아직 나는 아무것도, 이렇다 할 존재가 되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작가가 된다. 쓰는 사람이 곧 작가니까.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지금은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글 쓸 용기가 생긴다. 과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공허함에 빠진 나에서 완전히 바뀌어 버린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까.



며칠 전부터 새벽에 조금 일찍 일어나 책 한 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졸음과 씨름하느라 앉은 채로 졸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다. 나도 무언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덕분이다. 

 30년 전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어떤 생각으로 책을 읽으셨을까?. 지금 내 모습은 그때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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