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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an 27. 2024

어른

아버지의 공구가방

21년도의 일이다.  글쓰기에 재미 붙어 내 실력을 확인받고 싶었다. 친한 사람들에게 직접 쓴 글을 보냈다. 그중에는 어느 부분이 어색하다면서 이렇게 고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는 반면 아예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어라 아무 대답이 없으니 괜한 짓을 했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글쓰기 공모전'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형식이 다양했다. 독후감, 수필, 소설, 시, 슬로건 등등. 인터넷에 올라온 당선 작을 뒤적거리면서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늘 '나도 이렇게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지냈다.


어릴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때 나이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는데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다.

당시 하루 두 번, 그것도 눈이라도 많이 내리는 날에는 마을까지 들어오지 않는 버스를 타기 위해 한 시간을 꼬박 걸어 다른 마을의 버스 정류장까지 가야 했던 때였다.

학교에 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 도로 양옆으로 쌓인 눈을 피해 검은색 네모난 가방을 메고 아침 일찍부터 걸어가야 했다.

 운동화에 스며드는 겨울은 걷는 내내 발가락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하필 같은 또래가 없다 보니 옆집  중학생 형을 따라갔는데, 걷다 보면 멀어지고 그렇다고 다시 뛰자니 덜그럭 거리는 가방 때문에 얼마 못 갔다.  

 '교실에 가기까지가 이렇게 힘든 일인가'

겨울만 되면 내일 아침, 잠에서 깼을 때  뿅 하고 어른이 되어있는 발칙한 상상을 했었다.

 

 글을 쓰면서 기억 속 어린 시절의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땐 그랬는데'라며 닫혀 있었던 머릿속 서랍을 열어 그 시간을 떠올렸다.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어 하던 내가 이제는 마흔을 앞두고 있다. 더 이상 발이 시리도록 걷지 않아도 되고, 옆집 중학생 형보다 다리가 길게 컸다.

얼마 전에는 고향 집에 들러 어린 시절의 내가 바라본 어른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키가 큰 어른과 나란히 설 때면 내 키가 30센티는 더 크다며 농담도 던지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말없이 웃고 있었지만, 분명 배가 아프셨을 거다.

 

고향 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곳 현관문 앞 신발장에는 오래된 아버지의 공구 가방이 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얼룩이 묻어 지워지지 않아도 그걸 몇 십 년째 버리지 않고 이사를 할 때도 늘 함께 다녔다. 사용하지도 않는 가방을 가지고 있는다며 어머니의 잔소리가 가끔 있었지만, 마치 그것까지도 세월의 얼룩처럼 들릴 뿐 가방은 묵묵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번은 새 공구 함을 사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이런 걸 뭐 하러 사 오느냐고 투덜거리면서도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공구를 옮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뒷모습에 말을 걸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농담처럼 한 마디 건넸다.

"이참에 그것 좀 버리세요. 먼지도 잔뜩 묻어서 더럽잖아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신발장도 정리 좀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현관문 앞에서는 덜그럭 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뭐 알아서 하시겠죠."


그날 저녁, 기념으로 오랜만에 아버지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지방 대학을 다니느라 스무 살 이후로는 집에서 지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약속이 몇 달 만이었다.

 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수차례, 지금까지도 인근 공사장 인부 일을 하는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일을 자랑스레 내놓았다. 대부분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뿐이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오후의 공구가방 이야기였다.

 

그 공구 가방은 특별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어도, 한 겨울 길이 얼어도 아버지와 함께 나갔다. 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기저기 뜯어졌지만 끝내 버리지 못했다. 손 잡이가 떨어질 것 같으면 어디선가 천을 주어다가 덧대었고, 날카로운 공구 날에 구멍이 뚫리면 또 덧대었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사용하지 않던 공구 가방을 선물이라고 주면 그제야 가방을 옮겼다. 그렇게 쌓인 아버지의 흔적은 신발장 맨 위 칸을 차지하더니 오늘은 두 번째 칸까지 차지했다. 아들에게 선물을 받은 덕분에 이전 것을 올려 둔 까닭이었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늘 등만 보이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넉넉지 않은 형편에 공사장 일을 다니느라 새벽엔 나가는 등을 잠결에 봤다면

늦은 밤에는 불 꺼진 거실에 바닥에 앉아 앉아 술잔을 드는 등을 봤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쉬지 않는 사람.

 커다랗게만 보이던 등이 오늘은 왜 그리 작게만 보이는지, 갈 곳 잃은 내 시선은 술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매일 새벽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짐을 메셨다.

아침 출근길에 매고,

밤늦게 퇴근하면서도 매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는 점차 무거워졌고

움츠린 등을 한참 펴보지만

힘든 척추는 더 이상 펼 수 없을 지경이다.


일 년이 지나고

그다음 해가 돼서도

어깨에 짊어진 짐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는다.


'인생은 시련이 가득한 소금 맛이라서

땀으로 자꾸만 희석해 줘야 한다고 한다.'

고 하셨다.


오늘도 나의 아버지께서는

등에 짐을 지고 나가신다.


매일 쏟아지는 인생의 소금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흘리는 땀은

내일의 내가 짊어질 무게다.


                 - 아버지.  습작. 19.12.20-


 20년도 시 공모전에서 입선 한 습작이다. 이른 새벽, 늦은 밤마다 이슬을 맞고 나가시는 아버지가 생각나지었다.

 직접 써놓고도 다시 읽으면 눈이 시큰하다.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목구멍에 콱 막혀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이 생각난다. '어른이 되어봐야 어른을 안다'라는 말. 학창 시절 잠시 일탈했던 나를 두고 했던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어른이 지고 있는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 나의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땀방울로 인생의 짠맛을 희석시킬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래서 그때 신발장의 낡은 공구함은 어떻게 됐냐면, 아직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아버지께는 흔적을 잊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흔적,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느라 흘린 땀방울의 흔적 말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마치 자신의 모든 흔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불안함 때문은 아닐까.

 내년에는 더 크고 좋은 공구 가방을 선물로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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