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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an 27. 2024

쓰는 사람, 작가

쓰는 사람의 정의

 어렸을 적 부모님은 초등학교 앞에서 국밥집 장사를 했다. 넓은 도로 반대편에서도 가게 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눈에 띄는 곳. 특히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하교할 더 잘 보였다. ‘밥집이 멀리서도 눈에 띄어야 손님이 많이 오지’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간판도 주변의 가게보다 훨씬 크게 만들었고, 가게 앞은 거의 매일 같이 고기 삶는 냄새가 났다.

 식당을 지나 주방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막혀있는 작은 창고가 나왔다. 그 안이 우리 가족 셋이 생활하는 단칸방이었다. 처음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 싶을 정도였지만 아버지의 손을 거치면서 차츰 ‘집’ 다운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내 주머니가 가벼워도, 나보다 없는 사람 마음은 챙겨야지’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였다. 때로는 가게 앞을 서성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가게로 들여 직접 뚝배기에 국물을 담아서는 밥까지 말아 한 그릇 대접하기도 했다.

 예전만 하더라도, 라면 하나까지 어머니가 끓여줘야만 식사하셨던 아버지였다. 주방을 들락거리는 건 여자가 하는 일이라며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바뀌게 된 건 가게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국밥집을 열기 전, 우리 가족은 시내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에 살았다. 하루 동안 마을에 들어오는 버스가 평균 2~3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시내에서 장이 설 때면 어머니 손 잡고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잠들면 종점에서 내려 또 몇십 분을 걸어야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정작 나는 가난이 무엇인지 몰랐다. 초등학교 1학년,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책상을 붙이고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비로소 가난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을 뿐.

 시내에 폐업한 국밥집을 인수해서 직접 운영하겠다는 말, 잠을 잘 곳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는 말,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전학 가야 한다는 말 등등.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본 이런 말을 듣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그렇게 몇 년을 창고를 개조한 방 한 칸에서 가족 셋이 잤다.      

 

어렸을 적 나의 기억국밥집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돈을 잘 버는 줄 알았다. 저녁 시간이면 설거지를 준비하는 그릇이 싱크대에 가득 찼고, 손님 또한 많았으니까.

 며칠째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무어라 말을 남겼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단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다. 일 년에 두 번, 아버지는 가게를 어머니에게만 맡기고 며칠씩 자리를 비웠다.

 주말 저녁에는 혼자 주방과 홀을 어머니 혼자 맡을 수 없기에 나도 손을 거들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나. 쟁반에 국밥 그릇을 담아 나르고 음식값을 치르고 나가는 손님에게 돈을 받아 어머니 앞치마에 구겨 넣었다. 어떤 손님은 그런 모습에 기특하다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과잣값’이라며 다시 내 손에 쥐여 준 날도 많았다.

 마지막 손님 한 명이 식사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가게 문을 세게 열고 들와서는 큰 소리로 손님을 내쫓았다.

“오늘 장사 안 해. 다 나가요.!”

나를 포함한 손님이 깜짝 놀라 아버지를 보는데, 깜짝 놀랐다. 어느새 아버지는 가게 안까지 들어와서는 출입구 가장 가까이 있는 식탁을 발로 차면서 수저통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모습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며 다시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겁에 질린 손님은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갔고, 엄마는 아버지를 말리려 매달렸으나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였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을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는 병이 생겨 몸을 회복하고자 산에 올라 단식을 했다는 사실까지. 그 시간이 어머니와 나는 유일하게 두 발 뻗고 잠잘 수 있었던 날이었었다는 것까지.


 술을 마시지만 않으면 ‘괜찮은 사람’ ‘부족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나누어 줄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술에 취하기만 하면 말은 달라졌다. 말 그대로 나에게는‘주정뱅이’‘욕쟁이’‘폭력적인 사람’으로 비쳤던 아버지였던 것.

가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다. 아버지가 발로 차 버린 의자는 바닥에 뒹굴었고 식탁에서 쏟아진 수저와 뚝 배 그릇의 파편이 온 사방에 흩어져 날아갔다. 내 옷에도 시뻘건 깍두기 국물이 튀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피인 줄 알고 어떻게든 나라도 빠져나가라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가게 안을 쳐다봤다.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주말 저녁, 누구는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좋은 곳으로 여행도 간다는데, 어린 시절에 겪었던 나의 주말은 깍두기 국물을 뒤집어쓴,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기억뿐이었다.


 한참을 가게 뒷골목에 앉아 있으면 조용해졌다. 제풀에 지친 아버지가 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든 것. 한 번은 그 모습에 이성을 잃고 칼을 든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그저 칼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뿐.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식당에서는 며칠 동안 고기 삶는 냄새가 나질 않았다. 깨진 그릇을 못 본 체하고 학교 가방을 멨다. 도시락을 싸지 못했으니 가는 길에 김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      


 어른이 된 뒤로는 국밥이 싫었다. 어쩌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오늘 점심은 요 앞 돼지국밥 어때?’라고 말할 땐 구역질이 났다.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는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뚝배기 그릇에 뜨거운 국물에 찬밥을 한 주걱 말아 깍두기 국물까지 넣어서는 금세 비웠던 기억은 아예 잊으려 했다. 마치 내 인생에 국밥이라는 음식은 없었던 것처럼.

 그랬던 내가 지금은 만약 누가 추억의 음식이 뭐냐고 묻느냐면 ‘멸치볶음 김밥’ 다음으로 ‘돼지국밥’이라고 답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이어진 두 부모님의 국밥 장사 덕분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그것과 지금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비록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께서 마신 술의 기억은 악몽이지만, 요즘같이 등이 움츠려지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 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벌써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몇 년째다.


“야, 작가라는 직업이 돈이 되기는 하냐?.”

“돈?. 당연히 안되지. 지금도 직장 다니면서 하는 거 보면 모르냐?”

“근데 그걸 왜 하고 있어?. 차라리 너 정도 스펙이면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서 돈도 더 많이 벌고 하면 좋잖아.”

“그러게, 나도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번 주말에는 도서관에 앉아 책 한 권을 통째로 다 읽고, 한참을 옛날 생각에 빠져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니까.”

“그런데, 왜?”

“왜? 나는 내가 열심히 쓰는 만큼 남길 수 있는 기억이 많아서 좋다.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오로지 회사에서의 승진과 사업에 매달려 돈을 좇느라 나밖에 몰랐던 그때가 부끄럽거든.”


 가난이 죽을 만큼 싫었다는 아버지, 국밥 장사 준비를 위해 매일 이른 새벽부터 돼지 내장을 손질하면서 얼굴에 튄 돼지 똥을 닦아가면서도 어떻게든 가게를 이어 가겠다며 일한 어머니. 어른이 된 나에게 두 분과의 엮인 기억이 돼지국밥과 깨진 뚝배기 그릇, 술병이 전부지만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이혼 과정에서 깨달은 건 가난하다는 건 돈이 아니라 마음이라 사실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의 크기나 만족도가 올라가는 건 아닐 테니까. ‘단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의 해답을 채울 수 있는 선택지가 조금 더 늘어난 것뿐. 결국, 돈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현실을 거부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말.


 이혼 직후 계좌에 남겨진 마이너스 숫자에 망연자실했던 때가 있었다. 화가 났고, 혼자가 된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술을 찾았다. 그러다 점차 횟수가 늘어났고 어느새 나도 과거의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을 앓았다.

 하지만 지금은 종이에 새겨진 ‘0’의 개수보다 늘어나는 ‘글자’의 개 수에 만족감을 느낀다. 서점에 들러 새로 출간된 책을 보면 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기대감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나는 남들이 정해놓은 길보라는 조금 다르더라도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쉬지 않고 걸어가고 싶다. 자칫 잘못해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힘을 기르고 싶다. 더딜지언정 나는 묵묵하게 내 삶을 걸어가고 갈 것이다.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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