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조용한 계절은 11월이다.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겨울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숨 고를 수 있는 여유도 선물해 준다. 내가 유난히 11월에 의미를 붙이는 이유가 있다. 올해의 마지막이라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즉, 새해를 12월에서 시작하고 이듬해 11월에서 끝낸다. 이상하게 느끼겠지만 이 셈법을 시작한 지는 3년이 됐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 시간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매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12월의 마지막 날에 돌아보면 한숨만 나왔다. 이렇게 또 한 살을 먹는구나 했다.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연말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많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팀원과 찐친 들과의 술자리는 나도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건 속을 헤집어 놓는 울렁거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주말에도 잠자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던 날을 대신해 나름의 정리가 필요하고 생각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집 근처 두 달짜리 정기 독서실 이용권을 끊었다.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는 날이면 집 대신 책상 앞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다니던 독서실은 거의 만실이었다.
누군가는 자격증 문제집과 또 누군가는 영어 강좌를 듣고 있었다. 나 또한 이 순간만큼은 직장인이 아니게 된다. 진지한 학생모드다. 각자의 꿈을 마음속에 품고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그들의 에너지를 받아가며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노트북에 처박아둔 글을 정리했다.
하루 한두 시간 정도만 짬을 낼 수 있다면 책 읽기를 추천하겠다. 주어진 시간 동안 온전히 집중만 할 수 있다면 최고로 좋은 정리의 기술 중 하나일 테니까.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를 따라 하기라도 하려는지, 요즘 삶이 얼룩덜룩 번졌다.
해결되지 못할 일들이 자꾸 삶에 뒤죽박죽이다.
단번에 해결되었어야 했다. 중간중간 쉼표를 찍어두면서 정리를 했어야 했다.
온라인 저서라던가, 공저 쓰기, 마라톤 준비, 그 외 에도 자잘한 목표로 세운일들.
가끔은 어제의 나와 지금,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한데 뒤 섞여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탄생시키도 하지만 오늘 내가 할 일을 정리하고 낙관을 가지면 또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걸 믿고 있다. 작년의 일기에도 그랬으니까.
아직도 깨지 못한 마음속 알들이 몇 개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금이 갔다. 언제라도 안에 갇혀 있던 또 다른 내가 깨고 나올 것 같지만 그럴수록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려 노력 중이다. 나에게 11월은 그런 의미다. 한 해의 거친 숨을 고르며 다음 알을 깨트리고 나올 나를 맞이하는 준비.
새벽, 고양이가 방문을 긁어대는 통에 못 참고 눈을 떴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지만 함께한 시간만큼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라 손바닥을 보여주니 턱을 쑥 내민다.
지나간 시간보다 남아있는 시간이 훨씬 적은 지금, 괜한 후회와 다짐이라는 그럴싸한 말보다는 그저 침대를 내려와 내딛는 걸음이 단단해졌으면 한다.
오늘도 쉼표를 찍어놓아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곧 있으면 나만의 새해다. 시간은 쉬는 법이 없다. 대신 약간의 침묵을 제공한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침묵을 이용해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는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으니 지금껏 뿌려놓은 씨앗의 결실을 하나둘 찾아내길 기억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