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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쥐어 짤 수 있다면

시집 [그리움 갈아입기]

by 회색달



토요일 아침,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공기가 차다. 그렇지만 겨울이 더 가까이 오기 전 나만의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일명 겨울나기 준비 대 작전.

옥상 살이가 쉬운 일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바닥이며 창틀, 창문에 쌓이는 먼지 때문에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차일피일 미뤘다. 핑계는 후회가 됐다. '조금 더 일찍 할걸.'


작년 옥탑 방으로 이사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창틀의 가득 낀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었다. 추석 연휴가 끼어 있어 며칠을 닦고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창문을 닦는 건 쉬웠다. 하지만 창틀 모서리에 얼룩진 먼지는 쉽지 않았다. 고무장갑 끼고 철수세미를 이용해 힘을 주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괜한 욕심에 월세 살이 끝날 때 물어주어야 할 것 같은 걱정이 들어 포기했다.


정체 모를 얼룩은 그대로 남아 올해 가을까지 이어졌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지만 왠지 이번에도 포기해야 할 것만 같다.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을 땐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마지막까지 교제하던 여인을 잊고 싶어서였다. 다투거나 의견충돌은 없었다. 그냥 서로가 맞지 않음을 느껴 약 1년 정도 교제하다 정리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어색했다. 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서로 의견을 내던 하루가 없어지니 낯설었다.


이른 아침, 혹은 글을 쓰던 습관을 만들던 때였다. 잘되었다 싶어 어색함을 익숙함으로 채우고자 했다. 닥치는는 대로 기록 했다.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남겨뒀다.


창틀 청소 중에 물이 방 안으로 넘쳐흘렀다. 하필 바닥에 정리 안되어 있는 종이에 튀는 바람에 기껏 남겨둔 기록이 번졌다. 무슨 중요한 역사 기록도 아닌 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남기고 있었을까.


그래도 얻은 건 있다. 수 백장 넘는 a4용지 더미와 노트북 속 아직 꺼내어 놓지 못한 나의 기록들. 종종 꺼내어 읽다 보면 마치 그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슬픔과 공허, 허전함,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무조건 피할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락스물을 풀어 걸레를 빨았다. 고무장갑 낀 손으로 물기를 꽉 짰다. 바닥에 흥건해졌다. 몸 안에 쌓인 슬픔도 이렇게 쥐어짜 없어졌으면 좋겠다. 손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희미해질 때까지 더라도 나는 놓지 않을 수 있는데.


올해도 틀렸다. 창틀의 얼룩은 아직도 그대로다.

그대로 안고 가야겠다. 그거 하나 있다고 흠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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