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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Nov 20. 2024

글쓰기 기적

사무실 아침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뭐가 그리 아쉬운지, 벽에 걸린 한 장 짜리 달력을 몇 번이고 들춰보는 A와 그 모습을 본 B의 대화 덕분이었다.

"아니 뭘 그리 쳐다봐?. 그래봐야 벽이야."

"팀장님,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이랍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이 먹으면 무덤덤해.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연말이라고 하니, 아쉬워서 그렇죠.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둘의 대화를 들은 C가 말했다.

"자자, 김 빠지는 소리 그만하고, 마무리 잘합시다. 마무리 잘하면 되지. 그런 의미로 오늘도 안전하게! 일합시다! 안전하게!"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길 날짜를 얼마 남지 않을 즈음이 되면, 올 해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한 편으로는 '올 해에는 내가 뭘 했지?' 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몇 년 전부터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나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도 있다. 기록이 모여 올해의 역사가 되는 법. 특히 요즘처럼 한 해를 돌아보는 시기가 될 때면 과거의 나와 연결되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어 든든하다.


 22년 에는 '하루 한 편의 시'라는 주제로 100일 동안 쉬지 않고 썼다. 그렇게 지어진 하루의 시는 나에게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과거 여행 티켓이 됐다. 그 뒤로 매일 아침 5분 독서, 서평 쓰기와 같은 그날의 기록이 습관처럼 남아 있다.


 처음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다. 글 쓰기는커녕, 제대로 책 읽는 법 조차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책은 나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차라리 스마트폰을 열어 인터넷에 접속하면 해결될 일을 왜 시간을 들여 가며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나를 180도 변하게 만든 책이 있다. 바로 [아티스트웨이] (줄리아 카메론 지음)다. 이 책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때의 내가 기록을 남겨 둔 덕분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후배의 추천으로 참석한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였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한다는 게 힘들긴 했지만, 참석하기 위해 며칠을 도서관까지 가 앉아 읽었던 기록도 남아 있었다.


 줄리아의 이야기는 이렇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생각을 약 20여분 동안 a4용지에 쓰는 순간부터 삶이 변하기 시작할 테니 꼭 해보라는 줄거리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기상 방법과, 주차별로 방법도 적혀 있었다.

중요한 건 눈을 뜨자마자 적기 시작하라는 것.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가 하루 중 가장 창의성이 높다는 그녀의 말에 처음엔 의심을 했지만 그 일을 반복하다 보니 무슨 말인지 점차 깨닫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사회화를 거친다. 가족과 함께 산다면 자신의 방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부터, 직장인이라면 출근하는 순간부터, 학생은 등교하는 순간부터가 사회화다. 줄리아의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자신의 고유한 창의성의 색깔이 옅어질 수 있으므로 최대한 빨리 나와 친해질 수 있는 일을 해보라는 것. 사실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

그림, 글쓰기, 음악 작곡, 조형제작 등등. 무엇이 되었든 중요한 건 이른 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하라는 것. 그리고 12주 동안 반복 할 수 있다면, 분명 또 다른 신기한 삶이 뒤 따라올 수 있다고도 덧 붙였다. 가령, 수 십 편의 글을 쓰면 책을 써 출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가, 책을 쓸 수 있다고?'


 마침 당시에는 책 쓰기에 관심이 생겨 글쓰기 수업부터, 책 쓰는 과정까지 찾아볼 때였다. 문제는 '글 쓰지 않는 사람은 책을 낼 수 없다'라는 아주 단순한 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았다는 거다. 제대로 된 글 한 편을 쓰려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초고를 써야 했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 글 쓰기가 어렵다면 점심시간, 퇴근 시간에 하면 될 일' 인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말에도 특별한 일정이 없을 때면 도서관을 찾아 글을 썼다.

-나에게 필요한 건, 결정보다 결심이었다.-

(20년도 일기에 써놓은 문장 중. 당시 하정우 님의 걷는 사람을 읽고 기록 한 글이다)


 어쩔 땐 아예 초고를 밤에 적어 놓고 잠에 들었다. 출근길에, 점심시간에 초고를 꺼내어 다음 문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2년이 넘어 설 즈음 또 다른 삶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모전에서 입선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아티스트웨이를 만난 지 만 3년이 지났을 때였다.


 매일 일기 쓴다는 말을 주변에 했다. 몇몇 사람들은 '어른이 무슨 일기냐' '시간 많나 보다'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많으면서도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뒤에 와서는 '매일요? 어떻게요? 어떻게 매일 쓰나요?'라고 묻는 사람,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정해진 답은 하나다.


 '싫어하는 일이면 못하죠.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억지로 뇌를 속여서라도 말이죠. 중요한 자격증 시험공부를 위해 몇 달을 노력하듯 자신을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써보는 겁니다. 그럼 자연스레 글과 가까워집니다. 대신 나와 덜 친한 것, 덜 중요한 관계는 멀어지는 효과도 있답니다. 그러니 며칠이라도 좋으니 짧은 글이라도 연속성 있게 써보시는 걸 추천할게요'


 글 쓰는 일은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내 삶의 발자국을 다시 확인하는 길이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디뎠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두들겨 보는 시간도 될 수 있다. 가령 나의 실수담을 꺼내어 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 이 시간이 연속될수록 앞에 놓인 길은 분명 밝아질 것이다. 중간중간에 켜진 가로등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렇게만 된다면 그 뒤부터는 성장하느라 바빠진다.


 이렇듯 글 쓰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자신의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노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짐을 느낄 수 있다. 실수는 받아들이고 방법을 찾는 너그러운 자신이 되므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써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대부분 의아해하는 반응이지만 글 쓰기 전의 내 삶은 대부분 '나는 왜 이럴까'에서 멈추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라고 바뀐 건 전적으로 글 쓰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며 칠전 써놓은 글을 읽고 수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은 내년의 공모전 준비와 두 번째 책 쓰기 준비에 바쁘다. 과거 연말이라고 하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은 그동안 하루 한 편 글 쓰기를 더 길게 쓰려 노력 중이다.


 종종 내가 글 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거의 기록을 다시 이어 간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후회와 다짐이 혼재하여 심경이 복잡할 때도 있다. 그럴수록 더 깊게 숨을 들여 마시고 심호흡을 크게 해야겠다. 과거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 때문에 삶 자체가 흔들렸던 한 남자의 인생이 바뀐 건, 글 쓰기라는 기적 덕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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