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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바람을 기다린다.

by 회색달

23년도 가을, 처음으로 책을 출간했다. 전자책이었지만 당시 느꼈던 성취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방황하던 삶을 담아둔 습작이었지만 나름의 목차를 만들어 <독서습관 만드는 3가지 비법>이라는 제목도 지었다.




24년도 가을, 자주 연락하는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택'이라는 주제의 글 쓰기를 희망하는 저자 열명을 모집한다고 했다.

선뜻 손 들지 못했다. 책 쓰기 수업은 들은 적 있었지만 제대로 한 꼭지의 글의 마침표 찍어 본 일이 없었다. 대부분 초고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퇴고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대로 둔 글이 많았다. 한 참고 민 끝에 손을 들었다.

삼 개월 동안 초고와 퇴고를 거쳐 정식 출간했다. 모든 순간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내가,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24년 12월 4일, 책이 출간되어 서울 잠실 교보문고에 공저 책이 진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공저 작가가 모인 SNS 단체 채팅방은 한 참부터 시끌시끌했다.

창원에 있다는 A작가는 오후 반차를 신청하고는 서점에 왔다고 했다. 곧이어 책의 구매 인증사진이 올라왔다.


나도 지지 않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곧장 지하철을 타고 잠실로 향했다. 서점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신간 목록을 찾았다. 익숙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순간마다, 선택은 옳았다.>였다. 노력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평일에는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느라 퇴고할 엄두를 못 내다 주말에서나 도서관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읽어볼 수 있었다. 다들 시험공부에 매진인데, 나 혼자 딴짓(?) 하는 듯한 기분에 우쭐했다가도 얼마 못 가 막히는 문장에 한숨만 내쉬었던 시간이 얼마던가.


표지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 가없었다. 열 권을 구매했다. 책의 무게가 상당했다. 인터넷에서만 주문했었지 직접 책을 눈으로 보고 현장에서 구매한 적은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열 권이었다. 한 쪽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 넣으니 지퍼가 잠기지 않았다. 결국엔 쇼핑백을 하나 돈을 내고 받아 담아왔다.


지인과 가족에게 사인을 해 선물로 보냈다. 그동안 감사했고, 응원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시간도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고통이 아닌 성장에 필요한 성장통이라 받아들이기로 하고 묵묵히 써온 나 자신에게도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책 출간의 기쁨이 사라지기 전 전자책 한 권을 더 썼다. 벌써 두 번째 출간이었다. 분야는 시집. 습작으로 남겨둔 짧은 호흡의 글을 모아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그리움 갈아입기>라는 책을 썼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듯, 과거 기억을 그리워하기보단 추억으로 남겨두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25년도 1월, 이번엔 포레스트웨일 출판사의 공동저자로 참여해서는 <우리의 2025. 새로운 시작>을 출간했다. 멈추지 않는 성장의 연속이었다.


나의 행적을 자랑한 적은 없지만 주변 동료 중 고민거리 있는 사람에게 책을 주문해 선물로 줬다. 처음엔 어색해했다. 선물도 그런데 하물며 책이라니 더 그렇다고 했다.

그동안 책 쓴다는 말 한 적이 없거니와, 내가 책을 선물로 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다는 말도 했다.


지금 순간의 방황이 미래의 한 순간을 향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날 내가 흔들렸던 이유는 오늘이라는 곳으로 안내하기 위해 그토록 흔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소 속 이야기를 자주 털어놓던 여자 후배 J가 찾아왔다.

"선배님, 저 내년에 휴직계를 내려합니다."

여성에게 쉬운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몇 년을 꾸준히 일하던 후배였기에 놀랄 수 밖에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말이 좋아 휴직이지, 사직서와 다름없었다.

이유가 있었다. 해외에 나가 경험을 쌓아보고 싶었단다. 나는 알고 있었다. 몇 년째 승진이 안되었던 J였고, 무엇보다 작년 결혼식을 올린 신부에게 벅찼을 터다.

J는 따라준 드립 커피를 다 마시고는 종이컵을 꾸깃꾸깃 접으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의 말을 기다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의 대답은 명료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옳다. 그러니 후회는 말자. 다만 지금껏 노력 한 시간을 포기하기에는 아까우니 올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해보는 건 어때?'


J의 나이가 곧 서른이었다. 경력단절은 아니어도 새 곳에서 출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올해의 남은 시간만큼은 놓치고 있었던 '노력'에 관심 가져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말도 더했다.


나 또한 그런 적 있었지 않은가. 삶은 나에게 기대한 만큼 주지 않는다며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찼었던 시간들. 사실 삶은 그럴 의무가 없었다. 나는 삶에게 무조건 대가만 원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직급' '더 넓은 집' 차, 취미 등등.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빠른 승진뿐이라 생각했고 남들이 꺼려하는 업무까지 도맡아 했다. 그런데도 삶은 나를 거부했다.

몇 년째 승진예정자에서의 내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끝내 바닥난 자존감은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버텼다.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더 불어봐라, 눈 하나 깜빡이나!'라는 다짐으로 살았다. 직장일도 중요했지만 훨씬 중요 한 건 나였다. 자꾸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이 습작이었고 일기였다. 때로는 입에 담기 민망할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쓴 날도 있다. 선배 한 명이 괜한 트집을 잡은 날이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주변에 내 험담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나에게 사실을 전달했다. 처음엔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냐며 따지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다 성장통이라 여기기로 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식물의 새 순이 나려거든 추운 겨울을 버텨야 하듯 내 삶의 모든 통증을 성장하기 위해 겪는 통과의례라 여기기로 했다.


버팀은 단순히 자신의 자리에서 거센 바람과 싸우는 것만은 아니다. 연약한 살을 내어주고 그만큼 굳은살을 얻는 것이다. 삶의 주도권은 내가 쥐는 것이다. 아프다 울면 그만이지만 성장의 기회라 여기면 내 성장의 씨앗을 다른 곳에 날려 보낼 수도 있다. 만년 꼴찌, 실수 연발 우당탕탕 삶을 살던 내가 작가의 길을 걷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J는 작년 겨울 휴직계를 내지 않았다. 원하던 승진 대상자에 이름은 없었지만 다른 부서로 이동을 신청한 덕분에 업무량이 줄었고 무엇보다 야근에서 벗어난 덕분이었다. 퇴근 후엔 남편과 저녁 데이트를 한다며 총총걸음으로 나가는 뒷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대기도 순환하지 않는다. 흐리지 않는 공기는 금방 퀴퀴해지기 마련이다. 사람 사는데도 좋지 않다. 결국 바람이 불어야 살 수 있다. 바람을 무서워 말자. 피하지 말자. 나만의 씨앗을 날려줄 적당한 때를 기다리자. 분명 좋은 날은 온다. 그러니 믿자. 곧 순풍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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