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세 명 중 한 명은 걸린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한동안 말도 못 하게 아플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에 잔뜩 겁을 먹었다. 아직 몸과 정신이 온전할 때 비상식량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 봐야 동네 마트 표 포장 음식과 대용량 물, 통조림 형태의 죽이 전부였지만, 법으로 정해놓은 격리 기간을 버티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안방으로부터 열 걸음 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평수가 작은 아파트 탓에 안방 화장실이 없어 침대를 문 앞까지 옮겨놨다. 침대 옆에는 책상을 끌어다가 물까지 쌓아놨다. 만만의 준비를 마쳤다.
확진을 받은 다음 날,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천장이 흔들거렸다. 이미 들은 바가 있어 급하게 해열제를 몇 알 먹었다. 이 시간이 얼른 지났으면 했다. 다행히 그 뒤로 열흘 동안 큰 아픔은 없었다.
격리 기간 마지막 날에는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시기를 몇 번했다.
쉽지 않다. 후유증이 남는다고 했으니 우선은 두고 봐야겠다.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도 마지막으로 벗어놓은 그대로다. 문밖 세상은 쉬지 않고 움직였을 텐데, 마치 이곳만 정지된 느낌이다. 그동안의 게으름을 코로나 탓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집안 곳곳에 쌓인 무기력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 가득 먼지며, 격리 기간 내놓지 못한 쓰레기봉투까지. 보다 못해 혼잣말로 몸에 시동을 걸었다. ‘움직이자!.'
양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아파트 공용 분리수거장으로 걸어가는데, 아직 치우지 못한 눈이 쌓여있다. 얇은 운동화를 신어서인지 몇 걸음에 발이 시리다. 분리 수거함 옆으로 쌓인 봉투 위에 테트리스 게임을 했다. 우선 큰 것부터 올려놓고, 작은 것 두 개를 쌓았다.
아파트 옆으로는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산책로가 있어 사람이 꽤 많았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일상 때문에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만큼은 걷고 싶었다. 천천히 걸어서라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저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군데군데 눈이 아직 녹지 않았지만 밟을 만했다. 한 걸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소리,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 앞 볼이 시리도록 부는 바람까지. 집 밖 세상은 아직 차가운 겨울이었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다 돌 때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걸었는데도 등이 땀으로 제법 축축하다. 뜨거운 물을 틀어 온몸을 씻었다. 아직 남은 바이러스 때문일까, 머리가 욱신거렸다.
겨우 며칠, 세상과 단절된 동안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덕분에 정당한 게으름을 가질 수 있었지만, 급격하게 나빠진 건강 때문에 씁쓸했다.
누구보다 건강할 줄 알았다. 아니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다. 남들 코로나바이러스에 힘들어할 때도 나는 상관이 없을 줄 알았다. 뉴스에서 어떤 사람들은 걸린 줄도 모르고 아무 증상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아직 건강한 나이에 속하지 않는가.
심각한 오류였다. ‘나'에 대한 상태보다 남들의 기준에 나를 가둬두었던 시간이 생각났다.
대한민국의 남자에게는 2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취업을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 결혼 준비를 하고, 다시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모두가 똑같았고 이 틀에서 벗어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왜 취업에 그렇게까지 목숨 걸어야 하고 왜 결혼해야 하는지, '보통 사람'이라는 기준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발버둥처럼 보였다.
어느덧 나이 서른. 모든 기준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 몇 명 만 봐도 결혼과 가정을 꾸렸는데, 나만 혼자였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 정도가 딱 맞겠다. 무엇보다 나는 이루지 못한 보편적인 안정감이 부러웠다. ‘차라리 나도 남들처럼보통과 평범함을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 쳤으면 달라졌을까…?'
샤워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직 머리가 욱신거린다. 아직 내 몸에 침투한 코로나 19 바이러스와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나 보다.
후유증이 며칠 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남들처럼 살아보겠다고 노력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밤샘 공부 끝에 자격증 시험을 치른 날, 부모님과 친척, 주변에서 일으키는 성화에 입장했었던 결혼식장 외에도 남들의 삶을 따라 하면서 ‘인정' 받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까지. 어쩌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나'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해열제 한 알을 입에 물고 찬물 한 컵을 마셨다.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하다. 차라리 잘됐다. 남들처럼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앞으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발버둥을 쳐보기로 했다.
후회한들 바뀌는 건 없고, 내일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모든 삶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나'일 테니까.
앞으로 반복될 수천, 수만 번 반복될 발버둥을 다짐하며, 오늘을 마지막으로 코로나와의 이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앞서 헛발질했던 발버둥을 위로하고 다시 내지를 발버둥 사이에서 쓰는 글이다. 이 시간이 반복될수록 제대로 된 발버둥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나와 그리고 같은 하루를 살아내는 모두의 발버둥을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