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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Feb 24. 2024

18.지금, 여기

띄어쓰기의 힘

 이혼을 하기 전까지 나에게 여행은 사치였다. 20대가 되어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해봐야 고작 시외 버스 타고 다니면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 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10년 넘도록 직장을 다니면서 그리 많지 않은 월급을 펑펑 쓸 수는 없었기에 아끼고 모았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께서도 그랬으니까.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첫째도 절약, 둘째도 절약이 다인 줄 알았다. 두분은 그렇게 나를 키워내셨고 다들 한 번씩 다닌다는 외국한 번 간적 없다.


 혼자가 된 이후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회식자리나 특별한 때가 아닌 이상 '혼 술'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 퇴근 후 집 근처 식당에 앉아 반주를 찾게 되었다.


 혼술의 제일 낮은 단계가 일반 식당에서 마시는 '반주' 라던데, 처음엔 창피함에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물 컵에 물 대신 가득 따라 마셨다. 하지만 빈도가 많아지면 습관이 된다. 습관은 점차 사람을 망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 있었던 창피함도 잊는다. 그냥 막무가내가 된다.

 

 그 모습은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알코올 중독, 건망증. 분노조절 장애, 대인기피증, 공황장애가 생겼다. 그 뒤의 결과는 뻔하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직장 내에서 갈등, 업무 추진에 있어 잦은 실수와 반복되는 경위서 작성까지. 지금 와서 돼돌아보면 창피함을 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술 때문이었다. 일 년 가까이 맨 정신으로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긴 중독 생활에 나를 잃어갔다. 직장 상사로부터 '일 처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해'라던 칭찬은 이제 남얘기가 됐다. 한 번은 거울에 비쳐있는 내 모습을 봤는데, 한숨만 나왔다. 매일 술에 쪄들어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2~3일에 한번 할 까말까 하는 면도 도 문제였다. 술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얼굴에는 자주 검붉은 반점이 생겼다. 한 번은 염증이 있는지 모르고 그 위로 면도날을 대었다가 부어있는 피부를 그대로 날린 전도 있다. 하얀 세면대가 시뻘건 피로 물들었을 땐 '정말 내가 이러고 살아도 되나' 싶었다. 그러다가도 하루 이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을 찾았으니 이 정도면 불치병 수준이다.


 그렇게 1년 가까이 하루하루를 '멍'때리는 날이 많았다. 그 사이 승진 할 수 있는 기회도 날렸다. 나보다 똑똑하고 평판 좋은 후배들이 됐다. 그들 뒤에서 박수 쳐주느라 속이 탔지만 내 실수였다. '이제 와서 남을 탓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냥 있는 대로 살자.' 20대의 꿈이었던 직장생활은 무너졌고 어느덧 30의 후반을 달리는 나이가 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던데, 그 말이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루 동안 웃을 일이 없었고 무의미했다.


 피폐해진 삶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이대로 포기하면 편한데, 뭐 하러 아등바등 살아야 되나 '라는 생각과 머릿속엔 술뿐이었다. 부모님의 강언이 시작된 것이 이때였다. 지금까지 큰 소리 한 번 내신적 없으셨던 분이 이번만큼은 '잘 못하는 아들'에게 따끔한 한 마디가 필요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오셨다. 그것도 말도 없이 평일 퇴근 시간에.


 승용차로 운전하더라도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내일 새벽에도 시장에 장사하러 가셔야 되는데 그 길을 오셨다. 아버지는 별 내색 없이 그냥 현관문 앞에 서 계시는데 들어오시라는 말에도 '얼굴 봤으면 됐다' 한 마디를 하시고는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제 남은 건, 어머니의 쓴소리만 남았나' 했건만 두 분이서 미리 말이라도 맞추셨는지 반찬 싸왔으니 굶지 말라며 보자기만 쥐어주고는 아버지 뒤를 따랐다.


 '차라리 화를 내시지.' 욕을 한 바가지 라도 들었으면 속이 이러진 않았을 거다. 엘리베이터까지 고작 열 걸음 도 안 되는 거리인데 배웅할 엄두가 안 났다. 그냥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게 맞을 것 같았다. 오래된 아파트 복도에서 부모님이 탄 차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복도에 안내된 비상구 만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야, 요즘 잠은 좀 자냐? 너 지금 말이 아니야. 이대로 가면 진짜 죽을 것 같아. 병원이라도 가볼래? 나도 얼마 전에 불면증 때문에 정신과 가서 수면제 처방받았어. 그 뒤로 잘 자. 부끄러운 거 아니다. 필요하면 도움을 받아야지. 그게 용기야. 자존심을 버릴 줄 아는 거. 그거."


 10년 지기 친구의 말이었다. 직장 입사 동기다. 하필이면 왜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해줬는지, 이 말을 그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앞 서 이 친구에게 있었던 고생사를 옆에서 들어준 시간이 길어서일까, 아니면 다 이겨내고 보란 듯이 '인생아 덤벼라'를 외치고 있는 모습에 반해서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정신과를 찾아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을 받아 복용했고,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 참석하여 잃었던 나를 찾아왔다.


"야, 나 여행 간다. 자그마치 일주일이야. 제주도로 갈까 하고. 처음 가는 곳이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지만, 그래서 가보려고. 직장에서도 허락했어. 원래는 안 되는데 특별히 봐준데."


 자랑삼아 보낸 문자에 제주도 맛집과 자신이 다녀왔다는 사찰에 꼭 가보라며 사진까지 보내왔다.

"내가 종교는 믿지 않지만, 여기 가서 , 너 힘들게 했던 사람들 다 욕이라도 하고 와. 나도 해봤는데 속이 뻥 뚫리더라"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가지는 긴 휴가였다. 입사 날짜부터 세어보니 자그마치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전 까진 주말이나 평일 하루 이틀 정도를 끼어넣은 휴가가 전부였던 나에겐, 처음이었다. 마치 미지의 세상에 발을 내딛는 도전과도 같았다.      

     

 며칠 전부터 맛집이며 숙소를 검색하느라 밤늦은 시간까지 잠을 못 잤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체로 떠났던 수학여행의 전 날밤처럼 가방에 챙겨갈 목록을 정했다.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는 낯 선곳. 설렘 때문에 들뜬 채로 밤을 보냈다


 일주일동안 바다만 원 없이 봤다. 바닷가를 바라보는 카페에 앉아 봤고, 게스트 하우스의 마당에 앉아 봤고, 저녁엔 해변에 나가 계속 봤다. 둘레길이라고 해서 대표 여행지라는 곳도 걸으면서도 봤다. 볼 수록 느끼는 건 넓은 바다에 수 없이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들 지만 바다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큰 돌을 던져도 잠시 일렁 일뿐, 넓은 바다에 흠 하나 안 생긴다.

 그제야 가슴에 얹어놓았던 큰 돌 하나가 넓은 바다로 빠져나갔다. 제주도의 하늘과 바다 사이 수평선 끝까지 가라고 손에 잡힌 돌을 던졌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힘들다고 한 이유. 좀처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를. 무작정 쉬운 길로만 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주말 동안 떠돌다가 다시 돌아 왔는데, 자꾸만 지금 이곳에서 보다 더 나은 곳은 없을까 다른 세상을 기웃거렸다. 그러다보니 내 삶은 보잘것없어 보였고 나를 잃는 창피함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Nowhere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에 쓰인다. 이 단어를 분리해보면 흥미롭다. Now - Here. 즉 '지금 여기서'라는 의미심장한 의미로 풀이된다.


쉽게 떠났던 여행과 힘듦이라 여겼던 시간은 앞으로 의 긴 인생에 돌 한 개의 크기도 안된다고 바다가 가르쳐줬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인정하지 못하면 어디에 가서도 나는 계속 방황할 것 같다...'

 제주도 여행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파도를 맞고 있는 바다를 봤다. 바다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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