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브런치 600번째의 글
서른, 내 인생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멈추는 법을 몰랐고, 멈춰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파업을 선언했다. 우울증과 번아웃, 그리고 예상치 못한 약물이라는 늪까지.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바닥이었다. 부서진 조각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 그래도 어찌어찌, 주변의 도움과 병원 치료를 통해 간신히 다시 설 수 있었다. 이제 괜찮겠지, 다시 달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회복해서 다시 시작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 믿었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은 단단한 갑옷이 되어 나를 지켜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또다시 앞만 보고 달렸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지난번처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그때의 번아웃은 내게 '앞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이상한 교훈을 남긴 건지도 모른다. '휴식? 그건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누리는 사치야!' 뭐, 이런 거지.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라. 작년, 업무량이 미친 듯이 몰아쳤다. 야근은 일상이 되었고,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는 날이 많아졌다. 분명 과거에 한번 크게 데었던 경험이 있는데도, 또다시 똑같은 패턴에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 피로가 쌓이고, 짜증이 늘고, 세상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과거의 데자뷔 같았다. '설마, 또?'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어느 늦은 밤이었다. 퇴근 후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차가운 물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쓰러져 잘까 하다가, 문득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잠 안 올 때 데워먹던 따뜻한 우유가 생각났다. 왠지 모르게 따뜻한 게 마시고 싶었다.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우유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머그컵에 우유를 따르고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고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부드러움. 그 순간, 억지로 짊어지고 있던 삶의 무게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우유 한 모금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야, 너 너무 딱딱하게 살고 있는 거 아니야?' '굳이 그렇게까지 힘주고 살 필요 없어.'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나는 그동안 '강해야만 한다'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무쇠처럼 단단해야만 세상의 풍파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따뜻한 우유는 나에게 '부드러움'의 가치를 알려주었다. 억지로 힘을 주는 대신, 잠시 힘을 빼고 자신을 돌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무너지지 않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딱딱하게 굳은 땅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지만,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은 충격을 흡수하며 형태를 유지한다. 내 마음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따뜻한 우유 한 잔이 가르쳐준 것이다.
지난번 번아웃에서 회복하며 나는 나름대로 '강해졌다'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면서 깨달았다. 강해진 게 아니라, 그저 잠시 괜찮아졌던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괜찮아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만큼이나 '부드럽게 보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따뜻한 우유 한 잔. 그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멈춤의 신호였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였으며, 휴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앞으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무작정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우유 한 잔처럼, 내 마음에 부드러움을 허락하고, 나에게 필요한 휴식을 기꺼이 내어줄 것이다. 단단하게만 살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도 소중하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여리니까. 이제는 안다. 진짜 강함은 부드러움을 품을 때 완성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