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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워킹 패밀리’의 달콤 쌉싸름한 저녁 1

by 리얼라이어

‘워킹 패밀리’는 하루를 두 번 산다. 퇴근과 동시에 가정으로 출근한다. 무릇 맞벌이 부모만 그렇게 생각하기 쉬우나 자녀가 초등 4학년 이상이면 아이도 이에 포함을 시켜야 한다. 수학 때문이다.


4학년 수학부터는 분수, 소수의 연산, 각도, 도형 단원이 시작되기에 잘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한 학년 위로 올라가서 수학에 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 이미 중고등 수학 과정을 이수한 성인에게 느닷없이 약수, 배수, 통분 단원에 나오는 문제를 연산하라고 하면 막힘없이 술술 풀어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것을 5학년이 해내야 한다.


내가 선배 부모와 선생으로부터 들은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은 5학년 때 1차 ‘수포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매우 아찔한 말이다. 그러니 그 어떤 부모가 자녀를 수학 포기자로 만들고 싶어 하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가정으로 출근하는 부모가 각종 숙제와 자기 주도 학습을 위해 가정으로 출근하는 자녀보다 형편이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세 명으로 이뤄진 ‘워킹 패밀리’다. 퇴근과 동시에 가정으로 출근한다. 평일 기준 보통 18시부터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해 자정 무렵 세 명 모두 퇴근을 한다. 아내가 가장 먼저 출근하고 다음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딸아이 순이다.


18:00 - 19:00


아내

러시 아워를 피해 퇴근을 한다지만 다시 출근길에 오르는 운전대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도 <비긴 어게인> 노래 모음을 들으면 위안이 된다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을 해서 노래가 끝나지 않으면 시동을 끄지 않는다고 했다.


집으로 출근한 아내는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세탁기를 돌린 후 쌀을 씻는다. 그리고 소파에 잠시 몸을 맡긴다. 눈을 붙일 때도 있고, 통화를 할 때도 있고, SNS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바로 위의 친언니와 통화를 한다. 그 시간이 약 10여분 정도 될까? 그러다 집으로 출근한 나와 눈 맞춤을 할 때도 있고, 손 맞춤을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날은 어김없이,


“빡침, 빡침, 개빡침!”


말맛은 살벌하지만 악의가 없음을 나는 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것이지. 이제부터 아내는 쉼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본격적인 맛남의 광장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경춘선, 긴 퇴근길이지만 그래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위안을 삼는다. 읽을거리, 볼거리 모두 모바일 하나면 되니 늘 하는 생각이지만 세상 참 좋아졌다. 전철에서 내려 약 15분 동안 출근길이 이어진다. 제발 소나기만 내리지 말아 달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먼저 출근한 아내가 소파에 누워서 통화를 하고 있다. 언니다. 나는 먼저 건조대에 걸려 있는 빨래를 개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통화를 끝낸 아내가 살벌한 말을 외치며 조리대로 향하면,


“에고~ 오늘도 고생했네, 고생했어요.”


언젠가 아내에게 나의 이런 말이 위로가 되냐 물었더니 너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맞다. 나만 잘하면 아내가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다. 어쨌든 나도 부지런히 다음 일을 시작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딸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다.


‘학원 차 타면 연락 줘. 아빠가 나갈게’


잠시 후, 빨래가 종료된 세탁기에서 옷을 꺼낸 후 일부는 건조기로 보내고 나머지는 건조대에 건다.


딸아이

하교를 하고 학원으로 출근한 딸아이의 요즘 최대 애로점은 에어컨이다.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어 냉방병에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카디건 교복을 가지고 다닌다. 거기에 마스크는 답답함을 주고, 가방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13세 소녀는 성장판이 닫힐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빠 귀염둥이 차 탐’


하원 차에서 바라본 아빠가 자신을 향해 손 흔들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빠지지 않고 마중을 나가는 이유지.


집으로 출근한 딸아이는 바로 엄마와 대화를 시작한다. 오늘은 어쩌고 저쩌고, 누구는 어쩌고 저쩌고, 선생님은 어쩌고 저쩌고… 손을 씻으면서도,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심지어 곧 식사를 앞둔 짧은 시간에 학습지를 풀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딸아이에게 쌍따봉을 들어 보이니 별거 아니란다. 오히려 이게 되지 않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19:10 '워킹 패밀리'의 맛남의 광장이 시작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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