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민호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금상을 탔다. 금상을 탄 후 민호는 학교 생활이 전보다 편해졌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민호에게 눈길을 자주 주었고, 친구들은 민호에게 친근한 관심을 보였다. 글짓기에서 만큼은 재규가 늘 선두였는데, 새롭게 등장한 라이벌로 인해 재규 엄마는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에 문예특기자로 들어간 글짓기 선생을 재규에게 새로 붙였다.
일요일 날 민호 엄마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통화를 했다. 민호는 엄마가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요즘 들어 처음 보았다. 민호는 엄마가 겸손한 말투로 친구들과 통화를 했지만 아들 민호 자랑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긴 통화가 끝나고 민호와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기쁜 마음을 아빠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민호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서 대신 문자를 보냈다. 아들이 금상을 탔는데 아무리 바쁘고 무심한 아빠라 해도 전화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도록 아빠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삼 년 전, 민호의 부모님은 크게 부부싸움을 하고 아빠는 회사 근처로 집을 얻어 나갔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아빠를 만났지만 점차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이제는 일 년에 겨우 몇 번 얼굴을 볼뿐이지만 그나마도 서먹할 때가 많아 같이 오래 있지 못했다. 민호는 비밀 일기장을 꺼내 일기를 썼다. '아빠는 왜 우리 집을 싫어하는 걸까. (중략) 아빠를 미워하면 편한데 이해하려니까 힘들다.' 거세지는 빗소리가 민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잖아.
우린 다투더라도 애 앞에선 절대로...
아니지. 그냥 자기만 잘하면 싸울 일이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충성해.
난 아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바로 아내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충성, 충성'
첫 번째 '충성'은 아내에게 잘하겠다는 의미로, 두 번째 '충성'은 딸아이에게 모범이 되는 아빠가 되겠다는 의미로, 세 번째 '충성'은 훌륭한 등을 보고 자라게 해 준 내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의미다. 비록 삼 년 전에 아버지는 작고(作故)하셨지만 홀로 계신 어머니께 효(孝)를 다해야지.
나도 민호처럼 경우는 다르지만 초등학교 6년 내내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다. 그러니까 엄마와 아버지는 주말부부인셈이다. 아버지는 월요일 새벽녘이면 강원도 작은 마을에 있는 분교(分校)로 떠나셨다. 아마도 어둑어둑한 그 새벽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은 우리가 유일했을 것이다.
엄마는 주방에서 아버지가 타지에서 드실 음식을 고이 준비하고 계시다가 압력밥솥의 추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바로 아버지의 아침상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아버지도 엄마와 보조를 맞추며 떠날 채비를 하셨는데 행여 당신 때문에 두 자식들이 잠에서 깰까 봐 헛기침도 맘 편히 못하셨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평소 늦잠을 자던 나도 그 시간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만다. 소리에 깬 것이 아니라 어떤 쓸쓸한 기운에 절로 잠에서 깼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불을 박차고 내 방문을 빼꼼히 열어 두 분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나서려고 하는 찰나에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럴 때면 아버진 더 자라면서 당신의 아들을 한껏 안아주시곤 다시 잠자리에 들라 일으셨다. 잠시 뒤, 아주 작고 희미하게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또르르 흐른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 2시가 되면 대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이 되면 아무리 맛난 저녁상이 차려져 있어도 시무룩해지는 맘을 달랠 길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기에 미안하고 속상하셨는지 일요일 저녁의 메인 스피커를 자청하신다. 달변가(達辯家) 답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가족들을 웃게 해 주셨다. 그럼 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 엄마도 여동생도 '호호' 한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도 '껄껄' 웃으셨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지금 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 시절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여전히 내 왼쪽 뺨에 스며있음이다.
민호도 어서 나의 그 시절 그때처럼 아빠, 엄마 이렇게 다 같이 한 집에 모여 아이스크림을 사이좋게 나눠먹길 바랄 뿐이다. 민호야! 아빠도 민호를 많이 사랑하고 계실 거야. 우리 조금만 기다려 볼까?
엄마는 인내심을 갖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 자기 이야기를 할 만큼 한 상대방이 그제야 민호 엄마에게 묻는다. 민호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때부터 엄마는 민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본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민호 엄마는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금상을 탄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친구와 통화를 했다. 민호는 엄마가 겸손한 말투로 친구들과 통화를 했지만 아들 자랑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했는데,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민호 엄마처럼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자세를 경청(傾聽)이라고 한다.
경청(傾聽)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있는 동기(動機)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feedback)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기법이다.'라고 다음, 네이버 포털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화려한 말을 쏟아 내는 것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을 하면서 적절한 질문을 던져 상대방이 하고 싶은 얘기를 보다 잘할 수 있게 도와준다. 때문에 상대방과 질 높은 대화를 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감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대화를 할 때 주인공 병에서 벗어나기, 능동적으로 듣기(진심으로 듣기), 잘 관찰하기를 하면 된다.
결국, 굿 리스너(Listener)가 곧 굿 스피커(Speaker)다.
먼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청'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생활 속에서 경청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얘기 나누면서 경청이 어려운 이유, 경청의 중요성에 관해 서로 가볍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게 준비가 필요했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이 어려운 것은 경청의 습관에 길들여지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말하고 싶은 사람(스피커/Speaker)은 넘치는데 들어주는 사람(리스너/Listener)은 적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가족에게 '언성을 높이는 남자, 언성남'으로 불려지고 있으니 이게 다 경청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아니겠는가. 아, 찔린다. 아빠로서, 선생으로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능력이 부족한 내가 딸아이에게 '경청'에 관해 가르치려니 말이다.
텔레비전을 다 봤는데도 아빠는 전화하지 않았다. 민호는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타다닥, 타다닥. 빗소리가 들려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어둠을 할퀸 것처럼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죽죽 그어져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힘없는 가을 잎들이 툭툭 떨어져 나갔다.
쏴아. 거세지는 빗소리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민호는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았다. 맨 아래 서랍에서 비밀 일기장을 꺼냈다.
아빠는 왜 우리 집을 싫어하는 걸까. 언제부터 싫어하게 됐을까? 처음에는 엄마를 사랑했을 거다. 그러니까 결혼도 하고 나를 낳은 거겠지.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던 사람도 언제 가는 사랑하지 않게 된다. 아빠는 이제 나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아빠를 미워하면 편한데 이해하려니까 힘들다.
민호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된 본문 속 위의 문장을 딸 이이도 나와 같은 감정으로 느꼈을지 아니면 그저 읽고 말았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위의 문장을 같이 읽으며, 민호의 감정과 우리 세 가족에 관해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다 싶었다.
'어둠을 할퀸 것처럼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죽죽 그어져 있었다', '거세지는 빗소리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딸아이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읽었을까?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딸 이이도 경험한 적이 있을까? 그리고 혹, '아빠를 미워하면 편한데 이해하려니까 힘들다'처럼 아빠에게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빨강 연필> 다섯 번째 목차 '우리 집'은 제목처럼 편안하고 정답지만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만 큼은 어휘 익힘 노트를 확인하는 것보다 딸아이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어야지.
"윤쌤은 아빠로서, 어른으로서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이해심은 많은데... 가끔... 무서워."
"무서워? 정말?"
"음... 어... 그게 있잖아..."
며칠 전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 압구정동에 볼 일이 있어 세 가족 모두 오랜만에 나들이를 계획했다. 문제는 볼 일을 마치고 목적지로 향하는 중에 발생했다. 봄기운이 한껏 오른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도로에 차가 한가득, 골목골목에도 사람이 바글바글, 주차 자리도 이미 차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목적지는 겨우 1km를 앞두고 있었는데 나무늘보 같은 차의 움직임 때문에 조금씩 감정이 상해갔다. 그래도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입버릇과 약간의 거친 말에 딸아이가 내 눈치를 살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아내도 특별한 말 없이 무심하게 앞만 보고 있었으니 불안감마저 들었나 보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주차 전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딸아이는 평소 뒷좌석 가운데에 앉는다. 다소 자리가 불편해도 엄마, 아빠를 번갈아 보며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 날은 어느샌가 엄마 바로 뒷 좌석에 앉았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월요일 저녁, 아내의 귀띔에 속이 상한 나머지 이따 저녁을 먹으며 어떻게 딸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또다시 딸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는 생각에 입맛도 사라졌다. 둘이 산책을 하다가 딸아이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 있잖아. 토요일 차 안에서 되게 조마조마했어. 엄마는 말이 없지, 아빤 화가 잔뜩 났지. 이러다가 갑자기 엄마, 아빠가 차에서 내리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지금도 그 땔 생각 하면 가슴이 쿵쾅쿵쾅 거려. 분명 아빠는 노력 많이 한걸 내가 아는데..."
하면서 엉엉 울었다더라. 아! 딸아이의 높은 공감 능력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꼬꼬마 시절에 우리 부부가 심하게 말다툼을 하다가 딸아이를 두고 차에서 내렸던 기억까지도 강제 소환하게 했으니 이를 어쩌나 싶다. 민낯이라도 이렇게 민망하고 창피할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어렵지만 조심스레 말을 이어간다.
"아빠가 화나면 무섭지만 이해는 돼. 그래도 화 안내면 좋겠어. 근데 엄마한테 뭐 들은 얘기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빨간 연필> 읽다가 민호가 생각나서..."
"아, 그래? 우리... 다른 얘기 할까? 아빠!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 진짜 말도 잘해?"
멍하니 말소리를 듣는 것과 적극적인 경청은 하늘과 땅 차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란 바로 적극적인 경청이 빚어낸 커뮤니케이션의 정수(精髓)가 아닐까 한다. 우리 둘은 그렇게 1시간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나 민호 아빠나 별반 다를 것 없다. 점점 훌륭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자꾸 어리석은 철부지가 되어간다. 나라는 사람 말이다.
책 <리스너>는 정신과 의사 류미 선생님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발견한 소소하지만 중요한 ‘경청의 힘’을 소설로 풀어냈다. 소설의 기본 미덕인 재미는 물론 실생활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경청의 기술까지 이미 <리스너>를 읽은 독자라면 작가의 경청 내공을 당장이라도 배우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리스너(Listener)로서 자격증이 있는 작가가 그녀의 특기인 경청의 기술로 얻어낸 데이터베이스를 소설 곳곳에 잘 녹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늘 리스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에너지가 빨리는 일인지 책 주인공 송재림의 상담 활약과 감정 변화를 통해 작가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중 책 속 문장을 몇 개 소개하자면,
심우들을 만날수록 나의 경청 기술은 점점 업그레이드되었다. 데이터베이스도 모였을 뿐 아니라 촉도 점점 발달했다. 검은 뚜껑이 닫힌 종이컵에 커피를 들고 온 심우에게 “카페라떼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어서 심우를 놀라게 한적도 있다. 어떻게 아느냐고? 빨대로 올라가는 소리가 다르다, 우유 거품이 있는 커피와 아메리카노는. 나의 경청 기술은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는 데서 시작한다.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일기장에 하소연이 길어졌다. 쿨하게 리스너의 길을 간다고 자부하면서. 또 다른 내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답 없는, 재미없는, 내용 없는 이야기를 '멍청하게' 계속 떠드는 사람들에게도 진심을 다해 공명하려고 하다 보면 나도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내 마음을 모르는데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철저히 그림자였다. 보이지 않게 스트레스가 쌓였다. 나부터 살아야 했다.
리스너의 최고 포인트는 상대방과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상대가 왈츠를 추면 나도 왈츠 스텝을 밟는다. 상대가 격정적인 탱고 리듬을 타면 나도 최대한 그 리듬 안에서 놀아야 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체력이 소진되는 일이다. 듣는 일은 뇌를 쓰는 일이고, 뇌의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곤한 상태로는 상대의 말을 들어줄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나는 당시 이 책을 읽고 '나는 누군가의 ‘리스너’ 였던 적이 있었나?'라고 반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3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반문을 반복할 뿐 스피커 역할에 더욱 충실한 남편, 아빠, 어른의 모습인 것 같아 가족에게 부끄럽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리스너’ 였던 적이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