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왜 먹방을 좋아할까?
정치판에서 음식은 정치라지만...
먹방(먹는 방송), 쿡방(요리하는 방송)의 관심은 인기를 넘어서 과잉이다. 최근에도 먹방, 쿡방을 표방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송출되고 크리에이터도 여전히 늘고 있다. 다만, 정글과도 같은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니 타 방송, 타 크리에이터와 차별화를 꾀하려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라도 힘을 다해 고생스럽게 싸우는 형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출연자의 학교폭력과 같은 인성 논란이나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이라 해놓곤 뒷 광고 논란이 일면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달리 어찌할 방법 없이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만다. 이렇게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 세상엔 참 정답 없고, 비밀 없고, 공짜 없다. 그러나 저러나 음식, 넌 무슨 죄란 말이냐!
음식은 누구나 매일, 매번 먹고 대해야 하는 일상이다. 그래서 음식은 모든 사람에게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셀러브리티(celebrity)나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그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되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다만, 누군가에게 음식은 먹고사는 삶과 직결되어 있지만 정치판에서 음식은 유권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마음을 끄는 정치적인 도구로 쓰인다.
선거철만 되면 전통시장이 정치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국밥 한 그릇, 떡볶이 한 접시, 어묵 꼬치 하나로 '서민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 정치인일수록 소박한 음식을 먹는 모습이 유독 주목을 받는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두고 선거철 또는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모습이라며 피로감을 표한다. 그럼에도 정치인은 전통시장과 길거리를 다니며 먹방에 여념이 없다. 이렇듯 소탈한 음식을 먹으며 민심을 살피고 소통하려는 정치인에게 음식은 정치다. 정치판에서 음식은 정치인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7대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욕쟁이 할머니편' TV 광고를 통해 서민적인 면모를 풍겼다는 평을 받았다. 광고에서 국밥집 주인 할머니가 '맨날 쓸데없이 쌈박질이나 하고 지랄이여. 우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어!'라며 뚝배기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그리고 뜨거운 국밥을 푹푹 퍼먹는 이 전 대통령의 모습이 나온다. 이후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당시에 국밥을 먹는 후보의 모습이 설정인지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로 인상 깊었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이 전 대통령의 뜨거운 국밥은 싸늘하게 식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시장 음식에 집착한 나머지 영혼 없는 먹방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은 19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지원과 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 전통시장을 여러 차례 방문한 유명 정치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방문 당시에 어묵 꼬치를 겨우 입에 넣거나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마저도 사진을 찍는 것에 너무 치중해 이른바 '보여주기 식'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마찬가지로 황 전 대표도 21대 국회의원 선거 종로구 후보로서 첫행보 중 떡볶이와 어묵을 주전부리 음식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너무 사진을 의식하면서 먹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한 기색이었다는 취재진의 평이다. '먹방' 유세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 경우라 할 수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는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림에 따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에 의한 보궐선거’로 치러졌다. 특히 기존의 대통령 선거가 12월에 치러진 반면 19대 대선은 ‘대통령 궐위’라는 상황에서 치러지면서 5월 장미 대선이 됐다. 이 때도 어김없이 후보들의 '먹방'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다. 역시 단골 메뉴는 어묵, 순대, 떡볶이, 김밥 같은 서민 음식이다. 후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전통시장을 찾는 것은 유권자와 거리감을 좁힐 좋은 기회이자 서민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유권자는 자기와 같은 음식을 먹는 후보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선거에 나선 후보자가 햄버거나 피자와 같은 '먹방' 모습을 자주 노출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 어떤 미국 역대 대통령보다 선거 운동 이외도 백악관 밖 음식점에서 노출이 잦았다. 멕시칸 패스트푸드, 수제 햄버거 외 각종 패스트푸드점을 기꺼이 찾아 나선다.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부터 백악관 참모 심지어 외국 정상까지도 백악관 밖 음식점에 대동하기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방문에서는 쌀국수 음식점을 찾아 음식을 먹으며 병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어 대중들의 호감을 샀다. 역시 미국 음식 정치학의 대가다운 면모다.
반면 친근하게 보이려던 모습이 억지스럽거나 상황과 맞지 않아 여론의 뭇매를 맞은 해외 정치인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에 전용기나 사무실에서 치킨 먹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손으로 먹지 않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먹는 모습을 연출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 '집에서 쿠키나 굽느니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낫겠다 싶어 정치에 뛰어들었다'라고 말했다가 전업주부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크게 곤혹을 치른 바 있다. 말콤 턴불 전 호주 총리는 2018년에 호주의 서민 음식인 고기 파이를 나이프로 먹는 모습을 SNS에서 공개했다가 '파이게이트(piegate)'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정치에서 음식은 선거, 정책과 같은 민심을 잡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즉, 정치에서 음식은 정치적인 색깔이 짙다. 그럼에도 정치적 계산이 고려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는 스스로 권위 의식을 벗어던진 정치인에게 볼 수 있는 자세라 하겠다.
구드니 또르라시우스 요하네손 아이슬란드 대통령은 퇴근길 피자집에 들러서 남들과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렸다. 또 퇴임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두 정치인 모두 대표적인 '서민 대통령'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위 두 나라 정상 못지않다.
탈 권위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유난히 '먹방'이 많았던 전직 대통령이다. 인수위 사무실 앞 식당을 불쑥 찾아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대통령에 취임해서는 비서동에 집무실을 만들고 종종 참모들 방에 찾아 들어가 책상에 걸터앉아 보좌진과 의견을 나누며, 30대 후반 비서들에게는 담배를 권했다. 퇴임 후에는 부녀 회관에서 삼계탕도 먹고 막걸리도 마셨다. 아이가 내민 사탕도 받아먹고 봉지 커피도 타서 먹었다. 얼마 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94회 '국가 기밀' 특집으로 천상현 전 청와대 전담 셰프가 나와서 라면을 직접 끓여 먹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일화도 공개한 바 있다. 가식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먹고살 것 같은 대통령의 소탈한 '먹방'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가 김훈은 '밥은 삶이며 정서이다. 밥은 추상이 아니다. 밥은 개인의 목구멍을 넘어갈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무늬지어주고 시대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뜸이 든다. 밥은 서정이며, 또 서사인 것이다.'라고 했다. 무릇 밥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이 그럴 것이다. 음식은 먹는 행위 속에서 서사가 된다. 비록 정치판에서 음식이 정치적 도구로 쓰이더라도 사진만 남기는 민생 행보에만 그친다면 낡아빠진 구닥다리 유물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매번 선거철 때만 되면 반복적으로 민심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의 의례적인 '먹방'은 시민에게 냉소적인 반응만 얻을 수밖에.
개인적인 볼 일로 전통시장을 찾았다. 시장에선 어김없이 4월 17일 재보궐 선거 유세 운동이 한창이다. 유명 정치인은 보이지 않으나 상인들의 얼굴은 이미 짜증스러운 얼굴이 역력하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내가 좋아하는 분식집을 찾아 어묵 꼬치와 함께 떡볶이 한 접시를 후딱 해치웠다. 그나저나 당락에 상관없이 선거 이후 시장이나 기사를 통해 정치인의 '먹방'을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렵겠지! 분명 9월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추석은 9월이다. 영혼이 결여된 명절인사 현수막은 덤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