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랬어 다 뭐든지 늦었어 뭐든 빨리 깨닫지 못했던 나 너의 소중함들도 내게 온 그 기회들도 그땐 바보처럼 앞서가던 그 친구들의 뒷모습은 내게 거대한 그늘로
노래 도입부터 귀에 꽂혔다. 노랫말이 어쩜, 나와 닮았는지. 먼 퇴근길 여정에 위로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2018년 7월 어느 날 기억이다. 당시 평정심을 되찾지 못하고 일주일째 전전긍긍 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 노래를 듣고 나는 내가 '슬로우 스타터'라는 것을 믿기로 했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다만, 의연한 자세가 몸에 배어있지 않은 것이 걱정됐다. 행여 또다시 북받치는 쓸쓸한 기운이 몰아치면 '자기혐오'의 늪과 마주하게 될까 봐.
2018 '월간 윤종신' 1월 호 ‘Slow Starter’는 자신을 '슬로우 스타터'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걷는 삶을 예찬하는 윤종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자신이 타고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찍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앞을 길게 내다보면서 조금 더 치열하게 부딪히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좌절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노래를 통해 하고 싶었다고 한다.
윤종신의 삶의 철학은 참 한결같이 의연하다. 2019년 jtbc 방송 <슈퍼밴드>에서 심사 중 '본래 인생은 원래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덜 불행하려고 모두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노래를 듣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감동받았음을 전하는 동시에 경연에 참가한 밴드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즉, 당장의 인생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자 말자는 ‘Slow Starter’ 메시지를 닮았다.
[MV] 2018 월간 윤종신 1월호 - Slow Starter | 유튜브 채널 마지막 장면 캡처
야구에서 ‘슬로우 스타터’ 는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부진하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본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 즉, 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전 롯데 자이언츠, 히어로즈,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었던 김시진 전 감독도 선수 시절 '슬로우 스타터'였다. 몸이 늦게 풀리는 기질이 있어서 등판 후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아는 상대 팀은 김 전 감독의 제구가 잡히기 전에 총 공략을 펼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이자 1980년대 선동열, 최동원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를 지배했던 우완 특급 대투수로 우리나라 야구 역사 속 레전드다.
'슬로우 스타터'는 타인의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폭풍 성장을 일궈낸 사람이기도 하다. 고진영 선수는 2018년 LPGA 신인상을 받고, 2019년 메이저 대회 2승과 함께 시즌 3승을 거두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그런 그도 동갑내기 '골프 천재' 김효주 선수와 비교 대상에 자주 거론된다. 김효주 선수에 비해 한참 늦은 나이에 골프채를 잡았을뿐더러 김효주 선수가 정상에 오른 계단을 늘 몇 년 후에야 밟았다. 고진영 선수도 '슬로우 스타터'였던 셈이다.
스포츠에서뿐만 아니다. 1,009번 실패 후 68세에 KFC를 만든 커넬 할랜드 샌더스, 휴대폰 판매원에서 2007년 브리튼즈 갓 탈런트 우승자 폴 포츠, 가난한 이혼녀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앤 K. 롤링 등등 시작은 느리지만 뒤로 갈수록 뒷심을 발휘하는 사람들 모두가 '슬로우 스타터'다. 최근 역주행 신화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롤린'의 주인공 '브레이브 걸스' 또한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 모습이다. 특별한 성과 없이 그대로 사라질 뻔한 걸그룹이 한 달 만에 기적처럼 큰 인기를 얻으며 이제는 반대로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슬로우 스타터'들의 짜릿한 인생 역전승에 열광한다. 이는 성공한 커리어와 인생 승리를 동경하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슬로우 스타터'는 '결과 우선주의' 경향을 띈다. 중간의 과정보다 결과를 따르고, 그 사람이 성공했는냐 실패했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 기복이 있더라도, 비록 늦게 시작했더라도 뒤로 갈수록 뒷심을 발휘해서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슬로우 스타터'는 긍정의 시그널로 불린다. 앞서 언급한 김시진 전 감독과 고진영 선수와 같은 경우겠다. 그러나 중간의 과정에 서있는 사람 즉, 때에 이르지 않은 '슬로우 스타터'에게 이 말은 영원히 떼지 못할 것 같은 꼬리표처럼 느껴질 것이다.
2016년 어버이날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괜히 내 이름에 관해 불만이 생겼다. 혹, 이름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나름 신빙성 있는 자료를 찾았고, 기회가 되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야지 했는데, 하필 눈치 없이 어버이날에 사고를 친 것이다. 더군다나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으니 아버지께선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결론적으론 내 이름엔 문제가 없다. 대신 스스로 '슬로우 스타터' 성향을 알아채지 못한 우둔한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당시 내 이름에 관한 불만은 괜히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내 이름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뜻이 담겨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함이나 '슬로우 스타터'나 모두 '천천히'가 한 뿌리다. 학창 시절, 아니 20대까지만 해도 대기만성의 뜻을 헤아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러나 한해 한해 지날수록 친구와 주변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갔다. 난 여전히 제자리인데. 환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애먼 이름을 불쏘시개 역할로 점찍었으니... 하는 수없이 대기만성형 인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나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아 괴로웠다. 그러나 난 즉시 전력감이 아니었다.
2019년 12월부터 방영된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 단장(남궁민 님)과 고세혁 스카우터 팀장(이준혁 님) 간 대화신이다. 해당 스크립트를 잠깐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유튜브 채널 SBS Catch | 스브스캐치 > 스토브리그 중에서 캡처
백승수 단장 : 이 중에 *** 말고 누가 실적이 있습니까?
고세혁 팀장 : 대기만성형 몰라요? 대기만성형! 프로의 벽이 얼마나 높은데 그 1년을 보고...
백승수 단장 : 즉시 전략감도 없는 팀에 왜 매번 대기만성형이라는 얘기는 합니까? 현장 요청은 즉시 전력감 아니었어요?
고세혁 팀장 : 휴... 그럼 무능으로 합시다.
백승수 단장 : 고세혁 팀장님!
고세혁 팀장 : 뭐?
백승수 단장 : 전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4년 연속 꼴찌팀 스카우터 팀장이 상위 픽을 받고도 대기만성 드립을 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 참으로 뼈 때리는 구석이 있었다. 마치 백승수 단장이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백승수 단장 :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합니까?
슬로우 스타터 : 대기만성형 몰라요? 대기만성형!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은데 그 몇 년을 보고...
백승수 단장 : 이제는 즉시 전력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매번 대기만성형이라는 얘기만 하는 겁니까?
슬로우 스타터 : 휴... 그럼 무능으로 합시다.
백승수 단장 : 전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약 10여 년간 목표는 늘 같았지만 눈높이가 너무 높았던 것 같다. 내가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거창한 목표, 뜬구름 식인 목표를 설정한 탓이다. 이런 식의 목표는 아무래도 성공하기가 어렵고 무엇보다 실행을 하기에 까다롭다. 목표를 설정할 때는 실현 가능한 것부터, 아주 작은 목표라도 설정해서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 앞에 장사 없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즉시 전력감이 된다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대기만성'이나 '슬로우 스타터'나 즉시 전력감이 되어 기회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 운도 그때 따라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슬로우 스타터'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네이버 블로그와 브런치 필명이 그렇다. 참고로 네이버 블로그 이름과 브런치 계정 'real liar'는 '거짓말쟁이 보다 더 거짓말쟁이 같은 이야기꾼'을 모토로 지었다. 그러나 진짜 거짓말쟁이 같은 이야기꾼의 모습을 기대하기엔 까마득해 보인다. 그러나 세상사가 다 그렇듯 첫 술에 배부를 리 없다. 타고나지 않은 글쓰기 재능이라 A4 한 장 정도의 분량을 채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겨를이 있을 때 한 문장 한 문장 틈틈이 써나가고 있다. 특별히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땐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포기하지마 아프면 아픈 얘기 그 모든 순간순간 나만의 이야기야 멈추려 하지 마 분명 날아오를 기회가 와 좀 늦더라도 내 눈가의 주름 깊은 곳엔 뭐가 담길지 궁금하지 않니 답은 조금 미룬 채 지금은 조금 더 부딪혀봐
글쓰기 외에도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다. 이 또한 여전히 길 위에 있고, '슬로우 스타터' 삶에 한가운데 있다. 적잖은 나이임에도 성과가 미흡하다. 지금도 난, 앞서간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별 수없이 뚜벅뚜벅 내 길을 가고 있다. '슬로우 스타터'의 삶을 믿기로 한 이상 끝까지 걸어가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