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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보러 갈래?

경이로운 여름의 소리는 ‘나 잘 지내요’라고 말을 한다.

by 리얼라이어

일상은 단순하다. 까다롭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은 네모다. 네모처럼 일상은 단조롭다. 복잡할 것 같지만 세상 대부분도 네모로 이뤄졌다. 그래서인지 네모는 평화롭고 안도감을 준다. 참으로 오묘한 구석이 있는 네모다. 덕분에 네모가, 평화로운 일상이 사랑스럽다.


단, 같은 상대와 비슷한 연애 과정을 답습하는 바른생활만 큼은 예외다. ‘口(입 구)’와 네모는 일란성쌍둥이임에 틀림없다. 이토록 평온하고 온화한 사랑이라니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다. 사랑이 충만 지금! 꿈꿔온 정열적인 여름밤! 이제 그만 평화를 깨뜨릴 차례였다.




"별 보러 갈래?"


운이 좋았다. 빈자리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다른 DVD 방을 찾아 나설 무렵, 한 커플이 다투며 우리보다 먼저 그곳을 나가버렸다. 순간 전설의 포켓몬을 만난 기분이랄까? 과연 그녀는 은수(이영애 분)의 ‘라면… 먹고 갈래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심 기대하면서 팔짱을 끼고 화면을 응시하는 그녀를 곁눈질하기에 바빴다.


"별은 무슨? 네가 유지태라면 모를까."


우리 두 사람은 돌고 돌아 사랑을 시작했다. 그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리움도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 이 정도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잊지 못할 밤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뜨겁다는데, 우리의 여름밤은 그저 깊어만 갈 뿐이었다.


택시비까지 탈탈 털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손 흔들며 헤어진 내 손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갑을 뒤적거렸다. 혹시라도 쟁여 놓고 잊어버린 지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사였다. 그날 따라 유난히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다. 이따금씩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각다귀들이 양 팔, 얼굴, 목, 두 다리에 들러붙었다. 성가신 놈들. 필사적으로 떼어냈지만 그런데도 다리에 들러붙은 각다귀 한 놈이 아랑곳하지 않았다. 놈도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 나도 이 놈처럼 필사적으로 별 보러 가자고 했어야 했나 싶었다.


정말이지 후덥지근한 여름은 끔찍하다. 땀이 많은 나로서는 덥고 습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콧바람, 무섭게 자란 초록 식물들, 아지랑이를 토해내는 아스팔트 따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럼에도 여름의 소리는 좋아한다. 귀를 때리는 매미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귀를 간지럽히는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가 좋다. 하나의 계절 안에 밤낮의 소리가 이렇게도 뚜렷하고 짙음에 매년 여름이라는 계절을 경이롭게 맞이한다. 그러니 여름을 마냥 싫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누우려고. 뭐해?”

“누가 별 보러 가자는데, 아직 안 와서 나도 자려고.”


아버지 몰래 스페어 키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까치발로 거실을 횡단했다. 그리곤 7층 돌탑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벌써 10분이 지났음을 그녀의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알았다.


별을 보는 장소는 일찌감치 답사를 끝냈다. 별 관측은 사실 여름보다 겨울이다. 이 사실은 그녀도 잘 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저 까만 여름밤 위에 떠 있는 별이 아니다. 서로의 감정으로 하얗게, 빨갛게, 파랗게 띄워 올릴 불꽃이다. 풀벌레, 개구리, 뻐꾸기가 간헐적으로 운다. 아니, 이 순간을 영원히 추억하라는 귓속말이었다.




아내와 함께 9시를 넘겨 산책을 나왔다.


“휴~ 내일 또 얼마나 더우려나. 저 별 좀 봐.”

“내 앞에서 별 얘기 금지! 그날만 생각하면 내가 아주…”

“와~ 풀벌레 소리 좋다! 여름이 왔구나, 여름이 왔어요.”


그날, 지금의 아내인 당시의 그녀와 별을 보러 간 일은 어이없게도 수포로 돌아갔다. 교통사고 민원을 해결하고 서로 복귀하는 경찰 때문이었다. 훈계는 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여름이다. 여름이 데리고 오는 경이로운 이 계절의 소리는 ‘나 잘 지내요’라고 말을 한다. 올 해도 어김없이 후덥지근하겠지만 여름의 소리에 경청해야지. 그러다 보면 금세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여름을좋아하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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