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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Oct 20. 2021

아버지의 취미 - 낚시

나는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버지의 취미를 지켜줬다.

  혹시, 주위에 낚시광이 있으신가요? 

저도 처음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새벽같이 나와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


  이 이야기는 제가 아는 유일한 '낚시광' 저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나의 고향은 강원도 속초. 아버지의 바다. 


  속초는 거친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어 언제든 물놀이를 하러 놀러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돌아다니거나 날이 더운 날이면 속옷 바람으로 바다에 뛰어들곤 했다. 바닷 바위에 있는 작은 꽃게, 파도에 떠밀려온 작은 멸치 같은 다양한 것들을 잡기도 하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어렸을 땐 바닷속이 궁금하진 않았나 보다.


  아버지도 물놀이를 좋아하셨다. 몸을 바다에 던지고 노는 물놀이가 아닌 낚시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를 낚는 '낚시'를 좋아하셨다. 음식장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손님이 없는 시간엔 언제나 낚시채비를 하곤 하셨다. 바다에 나가서 바로 낚시를 던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두시는 것이었다. 종류는 얼마나 많은지 낚시 가방이 그 당시 나에겐 엄청난 창고 같았다. 낚싯줄, 바늘, 무게 추 등 바다에서 잘 보이도록 화려한 색들이 형형색색 낚시 장비들이 가득 차있었다. 뚝딱뚝딱 뭔가를 열심히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로 여겼다. 


  아버지는 진지하셨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신중히 채비를 하셨다. 완성된 채비를 낚싯대에 달고 쫙 펼쳐 볼 땐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시곤 다시 곧 비장해지셨다. 속으로 '좋았어. 완벽해'라고 말하는 게 느껴졌다. 채비가 끝나면 다시 장사를 하시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언제나 장사에 진심이셨던 아버지는 마음속 넓은 바다를 꽁꽁 숨겨둔 채 손님들을 위해 묵묵히 음식을 만드셨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코딩 동아리에 들어가 컴퓨터를 접했고 성인이 되어 속초를 떠나 컴퓨터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부모님 또한 경기가 좋지 않아 어머니 고향인 '원주'로 가게를 옮기게 되었다. 원주는 바다가 전혀 없었고 산과 강이 주를 이뤘다. 생계를 위해 온 원주였지만 아버지는 바다를 뒤로해야 하는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이삿짐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가져오게 된 낚싯대와 각종 장비. 어느 날 원주에서 본 낚시 장비는 작은 상자 같았다. 아마도 당분간 낚시를 못하거나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하셔서 많이 처분하신 것 같다. 아마도 낚시 장비만 처분하신 게 아닌 것 같다. 그 큰 바다를 두고 떠나오셨으니. 우리 가족은 가족여행을 항상 바닷가 근처로 다니게 되었고 우리 가족에게 바다는 그리움에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의 낚시 스타일은 무척 터프하고 활동적이었다.


  낚시 방법이나 어종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아버지는 여러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는 고기를 타깃으로 하는 낚시법을 주로 하셨다. 이름하여 '훌치기'. 이름처럼 낚시 방법도 엄청 터프하다. 주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숭어'를 잡기 위한 낚시법이었다. 방법이 조금 특이한데 훌치기낚시는 미끼를 사용하지 않고 물고기의 몸통을 공략하는 방식이다.


  훌치기는 수염 모양의 큰 낚시 바늘을 여러 개 층층이 달아 놓고 마지막에는 낚시를 날리기 위한 무거운 추가 달려있다. 완성된 모습은 치열한 전투에서 사용될 법하게 무시무시한 느낌이 든다.

  바다에 나선 아버지는 낚시 선글라스를 끼고 바다를 노려본다. 낚시 전용 선글라스는 물에 비치는 빛을 차단해주어 물고기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내 눈에는 그저 푸른 동해바다에 그쳤다. 아버지는 저기 보라며 물고기 때가 지나간다고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바닷속을 보는 초능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바다를 보며 숭어를 찾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신다. 발견되는 순간 낚시를 정확한 곳에 던지기 위해 테트라포트를 홍길동처럼 가로질러 재빨리 자리를 잡는다. 아직 어렸던 나는 방파제 길가에서 아버지의 머리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보며 그 뒤를 뒤늦게 졸졸 따라갔다. 아버지는 숭어 무리 쪽으로 낚시를 힘차게 던진다. 촤악~. 낚시가 날아가는 잠깐에 순간에 고요한 긴장감이 흐른다. 풍덩. 적당히 낚싯바늘이 가라앉을 찰나에 낚싯대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재빠를게 훌친다. 강하게 훌치는 순간 '솨악'소리가 검을 배는 듯하다.  당긴 만큼 빠르게 낚시를 감고 추가 가라앉을 때를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더 훌친다. 그렇게 훌치기가 3~4번 이어지고 난 후 아버지는 잠잠해진다. 고기가 걸렸나 확인하는 것이다. 낚싯대의 흔들림을 통해 고기가 걸렸는지 잠시 느껴보고 고기가 걸린 것을 감지하면 힘차게 낚시를 끌어당겨 내가 있는 방파제 쪽으로 고기를 넘긴다. 나는 고기가 무서워 한 발짝 떨어져 팔딱대는 고기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아버지는 무심하게 고기를 빼서 어망에 담에 다시 테트라포트로 사라진다. 이런 활동적인 낚시를 구경하며 나는 어른들이 하는 스포츠 정도로 생각했다. 마음 한편엔 나도 어른이 되면 낚시를 하는 듬직한 어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낚시는 언제나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버지가 하는 취미 정도로 내 기억 속엔 남아있다. 아니.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취미에 최대 난관은 어머니의 눈초리. 위험한 테트라포트를 다니는 것이 걱정되고 음식 장사를 위해 피곤한 몸을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낚시채비를 하고 계실 때면 어머니는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셨다. 찌릿. 아버지는 레이저를 피해 눈을 돌리고 주섬주섬 낚시 장비를 챙겨 창고에 다시 꼼꼼 숨겨 두셨다.



어쩌다 보니 아버지의 취미를 사수하는 수호신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성당에서 미사를 하는 동안 신부님을 도와 보조역할을 하는 '복사'라는 것을 했었다. 신부님이셨던 나의 삼촌이 멋있어 다니기 시작한 성당 생활이 재미있었다. 수녀님은 성당에 갈 때마다 언제나 말동무가 되어주며 놀아주셨고, 친구들과 마당에서 공을 차고 함께 노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성당에서 하는 많은 활동에 참가하곤 했다. 매주 한주의 복사 담당을 정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요일 새벽 미사에 계속 내가 배정되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내가 일요일 새벽 담당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열심히 다녔다. 어렸던 나를 성당으로 데려다주고 함께 미사를 드렸던 아버지. 일요일 새벽을 책임지고 있는 나도 대단했지만, 나를 오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아버지가 더 대단했다. 


  성당에서 새벽 미사는 2분기를 나누어 계절에 따라 해 뜨는 시간을 고려해서 정해진다. 여름에는 조금 일찍 시작하고 겨울에는 조금 늦게 시작한다. 그래서 새벽 미사가 끝나고 나오면 언제나 해가 동트고 있었다. 나는 미사 중간에 잠들어 미사 중 중요한 시간인 종을 치는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성실히 복사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부분 미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나는 바다로 향했다. 함께 향했다기보단 차 운전을 아버지가 했기에 난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다. 겨울엔 정말 추워서 나는 차에 있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 방파제로 아버지와 함께 나갔고 아버지는 낚시를 하셨다.. 


  아버지는 나의 복사 활동을 핑계로 낚시를 즐기고 계셨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와의 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고기를 잡아도 놔주고 가는 날은 분명 전날 어머니가 한소리 하셨던 거 같다. 아쉬워하며 낚시 다녀온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낚시 장비를 창고에 잘 숨겨놓으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낚시를 숨기기 위한 노력 정도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정리를 하는 도중 "아빠 차에 이거 빼야지"라고 이야기하며 함께 낚시 흔적을 없애곤 했다. 자연스레 공범이 되고 있었다.


  함께하는 내가 아버지는 마냥 귀엽고 좋았나 보다. 낚시를 가면 마트에서 군것질 거리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찬스가 주어졌고, 동생을 빼놓고 컵라면을 먹는 날도 있었다. 복사 활동도 하고 맛난 것도 먹고 막 잡아 올린 생선도 구경하고. 난 모든 게 좋을 수밖에. 그래도 낚시를 취미로 있어나갈 수 있도록 수호한 대가로 이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이런 소소함을 즐기며 영화에서나 보던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아닌 아버지에 취미를 지키는 영웅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일요일 아침을 이용해서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취미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렁이나 복잡한 낚시채비를 챙기기보단 정리가 쉽고 낚시터에 도착해서 바로 던질 수 있는 훌치기를 선택하셨던 거 같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일요일 새벽 복사를 책임질 수 있었던 배후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수녀님께 일러두어 남들이 제일 안 하려는 일요일 새벽 복사를 풀 예약 해두셨던 거다. 마치 낚시터 예약을 하듯이. 나의 복사 당번은 낚시터 예약을 위한 일종에 티켓팅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낚시를 이렇게까지 즐기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낚시 그 이상으로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 나온 이야기는 정말 작은 일부이다. 아버지의 낚시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물고기를 잡아서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녔을 테고, 잡은 물고기는 놔주는 경우도 많았다. 바다와 교감하는 시간이 즐거우셨던 거 같다. 아버지의 이런 심오한 낚시 세계를 이해해나가기엔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근차근 경험해볼 계획이다. 




혹시 주위에 못 말리는 낚시광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댓글로 함께 공유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

제가 최선을 다해 대변하고 공감해드리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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