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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Feb 16. 2019

# 11. 난 결코 늦지 않았다.

자신의 길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정확히 그 길을 따라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듯한 사람, 인생의 긴 길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다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임에도 그 사람은 담백한 미소를 입에 걸고 무리 없이 해내곤 한다. 정갈한 요리, 아름다운 풍경, 선명한 생활방식과 우아한 취미..., 어쩐지 내게는 멀게 느껴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겐 언제나 곁을 끼고 흐르는 소소한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육아 또한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그런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마치 초록빛 진행 신호가 켜진 도로에 나만 그대로 멈춰 선 기분이 든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교통지도를 펼쳐보는 초행길 운전자가 된 그런 느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그러니까 내가 스물넷이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지방에 가야 할 일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내게 자동차 키를 건네시더니 출발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으셨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인 데다 초행길이었다. 길을 물을 유일한 사람은 잠에 빠져든 상황, 고속도로 진출로를 잘못 들어 헤매고 거기에 몇 가지 실수까지 보태고 말았다. 한 번 헤매고, 한 번 실수할 때마다 운전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결국 아버지와 나는 오전 7시 40분까지 도착해야 할 목적지에 오전 10시  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출발한 것이 오전 6시 40분, 무려  시간  기척도 없이 주무시던 아버지는 그제야 비로소 시트를 바로 하고 일어나셨다.

 

질책이나 꾸중,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는 질문조차도 없었다. 시계를 힐끔 바라본 아버지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나는 너무 조급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서둘렀다.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지만 않았어도 세 시간 씩이나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주 조금의 여유만이라도 있었다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계셨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늦었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아. 네 머릿속에 정확한 지도가 그려졌으면 그걸로 충분해."

 
내 실수로 중요한 약속에 늦었으니 진중하게 사과를 드려야겠다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그게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의 길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정확히 그 길을 따라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듯한 사람, 인생의 긴 길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다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임에도 그 사람은 담백한 미소를 입에 걸고 무리 없이 해내곤 한다. 정갈한 요리, 아름다운 풍경, 선명한 생활방식과 우아한 취미..., 어쩐지 내게는 멀게 느껴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겐 언제나 곁을 끼고 흐르는 소소한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육아 또한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그런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마치 초록빛 진행 신호가 켜진 도로에 나만 그대로 멈춰 선 기분이 든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교통지도를 펼쳐보는 초행길 운전자가 된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런 사람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다.
 
난 결코 늦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지도를 천천히 완성해가고 있을 뿐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제제가 나아갈 길이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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