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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Feb 24. 2019

# 85. 돌고 돌아 결국

# 2018년 11월의 이야기
 

피었던 개나리가 결국 가지만 남겨진 채, 바람에 흐느끼는 모습을 볼 때 그랬다. 후드득 떨어지는 장맛비가 온 세상을 적실 때 그랬고, 스치는 가을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릴 때나,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내 차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니스와 제제가 내게로 오기 전, 그렇게 나는 보이는 모든 것들에 감정을 담고 거기에 그냥 빠져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목적지 없이, 만날 사람 없이 달렸다. 하룻밤에 부산의 바다와 목포의 바다를 모두 보고 서울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삶이 힘들어 그랬던 건 아니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없었을뿐더러 큰 욕심이나 집착도 없는 편이다 보니 어쩌면 감정의 결을 타고 노는 걸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품었던 교만, 내가 저지른 실수, 그렇게 내게 불리한 것들은 다 지워버리고 봄부터 겨울까지 사철의 감성으로 나를 곱게 포장한 드라마를 찍었다. 그리고 나는 그 드라마 속, 내 역할에 만족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제니스가 내 곁에 서고, 
제제가 우리 사이에 나타났다. 
 
감성의 영역을 넘나들던 나의 드라마는 그야말로 현실 일변도로 탈바꿈했다. 주말 멜로드라마가 일일 현실극으로 변신한 것보다 그 폭이 더 컸다. 작가 여러 명이 내 삶에 들어와 모든 대본을 수정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최선을 담아냈다고 자평하는 날도 잠시, 다음날 눈을 뜨면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제제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몸짓에 반응하는 일이 계속됐다. 가끔 우는 이유를 몰라 당황하거나 몸짓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날엔 깊이 자책했다. 내가 찍어왔던 삶의 드라마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의 이유인 것처럼 느껴져서 당혹스러웠다. 지난 시절, 나는 내 본연의 모자람을 마주하고 매서운 채찍질을 마다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감성의 영역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사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아... 빠." 
 
어느 날 제제는 입을 열어 아빠라는 말을 내뱉고는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제제가 나를 아빠라고 부른 날이었다. 제제의 커다란 눈동자엔 초라한 내 모습이 맺혀 있었다. 내 인생에서,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몸부터 마음까지 바르게 정리되기를 원했다. 봄을 지나고, 여름을 건너, 가을로 갔다가, 이내 겨울에 도달하는 그 길 위에서, 어떤 포장이나 덧붙임 없이 바른 자세로 서있고 싶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건, 감성 넘치는 트렌디 드라마도, 품격을 담아낸 드라마도 아니었다. 차라리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시간이 흐르고 제제는 42개월이 됐다. 고작 아빠란 단어 하나를 겨우 말하던 아이가 지금은 어른과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이다. 
 
"아빠도 나이가 들면 할아버지가 돼?" 
 
며칠 전, 제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만면에 가득 미소를 담아 제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아빠도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될 테고, 제제도 예쁜 아기의 아빠가 되겠지." 
 
말하는 와중에도 미래의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기분이 호락호락했다. 껄껄 웃다가 낌새가 이상해서 다시금 살펴보니 제제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빠가 할아버지 되는 거 싫어! 나이야, 저리 가! 아빠는 그냥 내 아빠야."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거실 천정 어딘가에 대고 고래고래 몇 번이고 고함을 지르더니 분이 조금 풀렸는지 제제는 곧 내 품으로 다가와 안겼다. 
 
"아빠, 할아버지로 변하면 안 돼!" 
 
"그래그래, 아빠는 계속 제제의 아빠 할게. 나이를 먹어도 늘 똑같은 모습으로 언제나 제제 곁에 씩씩하게 있을게." 
 
고생 끝에, 
돌고 돌아 다큐멘터리의 영역으로 들어왔더니 
또다시 감성 드라마가 시작됐다. 
 
#42개월 #아빠육아 #육아일상 
#할아버지되면안돼 #나이야저리가
#돌고돌아결국드라마

나이야 저리 가!!!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는 거 싫어!!! 제제가 42개월이던 2018년 11월의 이야기입니다.


제제가 말했어요. 아빠랑 엄마랑 나랑, 우리 셋이 평생 행복하게 살자~
나랑 함께 곤충도 보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즐겁게 놀자. 나는 착한 아이라서 아빠, 엄마 속상하게 안 할 거야.
장수풍뎅이도 함께 보고 애벌레도 함께 찾아보자.
나중에 낚시도 함께 가기로 했잖아.
우리 뭐든지 함께 하자. 알겠지? 아빠랑, 엄마랑, 나는 사이좋은 친구잖아.
아빠, 절대로 할아버지가 되면 안 돼! 내가 나비가 되어서 날개로 나이를 뻥 차 버릴 거야. (어이쿠, 효자 났네, 효자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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