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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Apr 09. 2019

# 103. 호수와 운명

# 호수와 운명

1996년 여름
 
당시 대학교 2학년생이던 나는 모 대학교 기숙사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기능공이 시공할 때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작업이 끝나면 공구를 정리해서 다음 작업 공간으로 옮겨야 했고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고 배치하는 것도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면 해가 질 무렵까지 쉼 없이 일했다. 공식적으로 주어진 휴식 시간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 30분 정도였다. 보통 그 시간에는 다들 낮잠을 청하는데 나는 현장 바로 앞 호수에 가는 걸 더 좋아했다. 호숫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대로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작업 시간이 되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게 내가 선택한 휴식이었다. 
 
그냥 쉬지 뭐하러 힘들게 호수까지 찾아가? 
 
저는 이게 쉬는 거예요. 
 
각종 공구들이 연주하는 엄청난 화음을 귀로 받아내며 버티다가 헐레벌떡 호숫가로 뛰어가면 거짓말처럼 평온이 찾아들었다. 내 곁을 격렬하게 스쳐 지나던 시간이 그대로 멈춘 채 내게 숨을 고를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르바이트 기간 내내 호수를 찾았다. 
 
모든 공정이 마무리되고 돌아오던 날, 호숫가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짧은 아르바이트 기간이었지만 호수는 내게 휴식을 건넨 친구나 다름없었다. 남김없이 눈으로 보고 마음에 가득 담아두려고 애썼다. 우연히 만난 이 호수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2003년 여름 
 
술자리가 있었다. 낯익은 사람 몇과 모르는 사람 몇이 동석했다. ○○대학교 출신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 호수가 떠올라 바로 물었더니 역시나 알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 중에 그 호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새로이 알게 된 그녀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같은 추억을 공유해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날 맥주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고 안주는 달았다. 
 
이후로 몇 번 더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행동거지는 조심스러웠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 법이 없었다. 쉽게 알은체를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호수 같았다. 
 
"아마 오래 알고 지내게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글쎄,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내가 말하고도 그게 정확히 무슨 기분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이 사람과는 길게 풀린 실타래의 양 끝을 붙들고 있는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 실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래 알고 지낼 거라는 말이 자연스레 입에서 흘러나왔다. 
 
 
2019년 2월 
 
제법 이른 시각에 준비를 마치고 세 식구가 사이좋게 집을 나섰다. 제제에게 필요한 옷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결혼 전 아내와 즐겨 찾던 식당을 찾아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차를 몰아 '그 호수'에 도착했다. 
 
"오 년 만인가요?" 
 
"그런 셈이네요. 연애할 때 이후로 처음이니까요." 
 
1995년, 내가 처음 만났던 호수.
2003년, 그녀도 알고 있던 호수.
2014년, 둘이 함께 다시 찾은 호수.
2019년, 이제는 셋이 된 우리를 반기는 호수. 
 
24년 전 여름에는 이 호수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내와 제제가 함께다. 이런 경우는 꿈속에서조차 상상해본 적이 없다.  
 
실타래의 양 끝을 잡고 있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타래 정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몹시 굵고 질긴 밧줄 세 가닥으로 우리를 묶어 이 호수로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었나 보다. 
 
아빠, 얼른 따라와. 
 
여보, 제제랑 사진 찍을래요? 
 
앞장서서 걷던 제제와 아내가 뒤돌아 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둘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처음 만난 2003년에 결혼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지금 제제가 몇 살이지? 
 
 
#46개월 #제제 #아빠육아 #육아이야기 
#호수 #운명 #그때_결혼할_걸_그랬어


2014년 여름 어느 호수 풍경입니다. 1995년에 이 호수를 처음 보고 무려 19년 만에 다시 찾아 사진을 찍었죠.
지금은 그로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습니다.
그 사이 제제가 태어나고 이만큼 자랐습니다.
5년 전에 호수를 찾아갔다가 들렀던 메밀국수 식당이에요.
면요리를 즐기는 제가 유일하게 100점 주는 곳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외관이 이런 모습으로 변했지만 맛은 그대로예요.
여기가 아빠 엄마가 좋아하는 식당이야?
이제 제제는 부모가 즐겨 찾는 맛집을 하나씩 방문하고 있어요. 연애시절엔 우리 둘 뿐이었는데 참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해물파전도 끝내줍니다. 하나하나 맛집 정보를 물려줄 생각이에요.
진짜야? 아빠, 고마워~
호수를 다시 찾았습니다. 1995년, 제가 처음 만났던 호수. 2003년, 그녀도 알고 있던 호수. 2014년, 둘이 함께 다시 찾은 호수.
2019년, 이제는 셋이 된 우리를 반기는 호수입니다.
이 호수를 아내와 함께 걸을 때도 신기했는데 이제 제제도 함께 걸으니 이건 운명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처음 이 호수를 바라보던 1995년, 제 스무 살 때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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