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haelKay Apr 09. 2019

# 104. 토끼와 거북이

# 토끼와 거북이 


말하는 목적지는 이미 눈치챘지만 일부러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하던 제제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벼가 많이 자라는 곳을 지나갔어. 길이 엄청 울퉁불퉁해. 꼬불꼬불 도로를 지나 산도 넘어가야 돼. 그다음엔 강이 흐르고 강가에 나무도 많아. 그 강에 다리가 있는데 지난번에 그 다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아빠랑 봤어." 


"음...,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정확하게 설명하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일부러 제제에게 *의뭉을 떨곤 하는데 모르는 척 잠자코 있으면 답답한 제제가 먼저 나서서 설명을 한다. 몇 개월 전에 비해 더욱 정교하면서도 유려한 답변이 작은 입술을 타고 술술 흘러나온다. 

 

"그럼 동굴 안에는 뭐가 있는데?" 


"기차 카페 위에 술병이 있고 동굴에는 산딸기랑 포도로 만든 술이 있어. 아빠도 좋아하는 술이랬잖아. 기억하지?" 


"아! 이제 알겠다. 와인 동굴이구나." 


가방에 필요한 물건을 넣고 간식을 챙기면서 힐긋 바라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제제의 표정이 밝다. 친절하게 알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천천히 제제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고맙긴 뭘." 


잠시 어깨를 으쓱거리던 제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으로 달려간다. 왜 그러는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해가 지면 동굴은 문을 닫는다고 그랬잖아. 빨리 움직여야 해. 아빠는 느림보 거북이야?" 


"토끼야, 알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논 사이로 뻗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가 꼬불꼬불 산길을 넘었다. 강변을 따라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기차가 지나던 긴 다리가 보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저 멀리 기차 카페가 우리를 반긴다. 물론 그 위엔 커다란 술병 모형이 비스듬히 올려져 있었다. 


모든 풍경이 토끼가 설명한 그대로다. 

크게 감탄한 거북이는 토끼를 품에 안고 와인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다. 


*의뭉 = 겉으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면서 속으로는 엉큼한 것. 


 

#46개월 #제제 #아빠육아 #육아이야기 

#아빠요리 #와인동굴 #정확하게_표현해_봐 

#어디든_데려갈게 #김해시



아빠, 내가 설명 잘했지?


요즘은 제제가 가고픈 곳을 말하면 저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반문해요.
가봤던 곳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듣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아빠, 꽃 의자가 그대로 있어.
베리야 너는 왜 작아졌니? (제제 본인이 자랐으면서 베리가 작아졌다고 생각하더군요.)
자, 우리 아빠야. 베리야 인사해~ 친구를 소개해줄 줄도 알게 됐습니다.
시간을 두고 같은 곳을 찾을 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기쁨을 느껴요.
훌쩍 자란 키도 그렇지만
풍부해진 표정과 몸짓도 금세 알아차리게 됩니다.
더 다양한 생각을 하고 그걸 표현하는 모습도 하나하나 소중하죠.
그래서 시간을 두고 가본 곳을 쭉 다시 찾습니다.
그래서 제제가 가본 곳에 또 가자고 말해도 귀찮지 않아요.
제제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때문에 평일에 이런 곳을 찾아가려면 사실 시간이 촉박합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보려고 애쓰고 있어요.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제제에게 간단한 간식을 먹이고 미리 준비한 가방을 들고 재빨리 집을 나서면 잠깐이나마 즐길 시간이 주어집니다.
제제, 맛있게 먹고 출발하자. 돼지 목살 스테이크입니다.
물론 다녀온 이후엔 더 바쁩니다.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는 오늘도 즐길 준비가 됐어요.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 103. 호수와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