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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05. 2019

# 15.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아빠가 기사님이 되어야 해." 
 
다짜고짜 배역을 던져주는 제제를 바라보며 갑옷을 입고 말 등에 올라타 긴 칼을 휘두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중세 유럽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망토에 덥수룩한 수염도 함께다. 
 
장난감을 보관하는 팬트리에서 트레일러트럭을 꺼내는 걸 보니 그쪽 기사님이 아니라 이쪽 기사님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 
 
"아빠가 기사님이면 제제는 누군데?" 
 
"난 선생님이야." 
 
아하, 그제야 알아듣고 제제 곁으로 다가갔다. 학생은 미니 공룡 장난감 오십 마리다.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갈 때, 기사님과 선생님들께서 차량을 운행하고 아이들을 인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방 한 편은 어린이집이고, 맞은편은 박물관이라고 정했다. 내 임무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니 공룡들이 탑승하기를 기다렸다가 박물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니 공룡들의 소풍길에 함께 나선 기사님인 셈이다.  
 
제법 긴 트레일러트럭을 후진해서 어린이집 앞에 안전하게 주차했다. 의도대로 정확하게 주차가 되니 그게 뭐라고 내심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어차피 앞으로 최소 삼십 분은, 인솔교사인 제제 선생님을 도와 소풍놀이를 해야 한다. 시들한 자세로 임하는 것보다 아예 두 팔을 걷어붙이고 열의를 담아 함께 놀자고 다짐했다. 
 
고작 방 하나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할 뿐인데 놀이가 한 시간을 넘어가니 제법 힘들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굳건한 자세의 제제 선생님이 그런 나를 보고 격려했다. 
 
"기사님, 힘내세요." 
 
박물관이라고 지칭한 쪽엔 어느새 포클레인이 등장해 나무들을 심었고, 어린이집엔 남은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덤프트럭과 운송 전문 트럭까지 대기 중이다. 
 
사실 꽤 단순한 놀이다. 
그저 미니 공룡 장난감들을 끊임없이 옮길 뿐인데 제제의 표정은 진지하고 매 순간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제제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내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친구네 집엔, 그 시절에 보기 힘들었던 목재를 가공해서 만든 블록이 있었다. 정육면체와 직육면체 몇 개뿐인 그 블록을 가지고 한 번 놀기 시작하면 어둠이 내리기 직전,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 목재 장난감은 내 마음속에서 트럭에서 버스로 변했다가 승용차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것들을 손으로 밀면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면 마치 내가 늠름한 기사님이 된 기분이었던 걸로 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 최선을 다해 함께 놀아야 한다.  
제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의 놀이다. 
 
"선생님, 어린이 공룡들이 다 탑승했나요?" 
 
"네, 차 문도 잘 닫았어요." 
 
상냥한 제제 선생님의 대답에 마이클 기사님은 즐거운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내 표정은 유년시절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백마를 타고 나타난 멋진 기사님이 아니면 어떠한가, 제제를 위해 장난감 트럭들을 운전하는 기사님도 충분히 멋지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아빠는 기사님이야. 졸지에 트레일러트럭 기사님이 됐어요.


제제 본인은 선생님이래요.
어린이집에 다니는 미니 공룡 친구들이 소풍을 가야 해서 기사님이 필요하대요.
기사님은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여기저기 소풍 장소라는 곳에 부지런히 공룡들을 태워다 줍니다.
다 함께 한 번에 소풍을 가기로 했어요.
미니 공룡들이 여기저기 열심히 탑승합니다.
운전 중에 공룡이 하나라도 넘어지면 제제 선생님이 지적합니다. 기사님, 안전하게 운전하세요!!!
여기저기 왔다갔다 수십 번을 하니 지칩니다.
그래도 지금 제제랑 함께 노는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유년시절의 기억을 살려가며 즐겁게 놀았어요.
자, 출발합니다. 기사님이 되어 미니 공룡들의 소풍길을 책임졌으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소풍을 즐기는 미니 공룡 친구들.
기사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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