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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16. 2019

# 03. 캔커피와 운명

2012년,
그러니까 내가 서른일곱이던 해의 일이다.
 
봄날의 어느 토요일,

대학 선후배들과 우이동에서 민박집을 잡아 술로 밤을 보냈다. 그들은 결혼을 했고 아빠가 된 사람들이었다. 일찌감치 가장이 되어 자식이 넷인 선배도 있었고,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후배조차도 돌쟁이 아들이 있었으니 모두 유부남이자 아빠임은 같았다.  
 
총각은 나 하나였다.
 
시작부터 유부남들의 공세가 계속됐다. '애인은 있느냐'로 포문을 연 내 자리 맞은편 오선배를 기준으로 좌우에서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아이를 낳아 봐야 어른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선배만 아직 아이네.
 
적당히 들어 넘기는 와중에 후배의 장난기 어린 말이 귀에 날아와 꽂혔다. 그 기세를 몰아 후배들이 여럿 달려들어 측은함이 담긴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것들, 대학 때처럼 매타작 한 번씩 해주랴?
 
단호한 어조로 어린 유부남들을 물리치고 나보다 늙은 유부남들을 술잔으로 무찌르기 시작했다. 역시 어린놈은 못 당하겠다며 서른일곱 먹은 어린 나의 대작에 선배들은 하나둘 내 곁에서 멀어졌다.
 
재미있었다.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임 몇 가지를 하며 술잔이 계속 돌아가니 너 나 할 것 없이 모조리 철없는 개(?)가 되었다. 어릴 때와 다른 점이라곤 안주가 넉넉하다는 것과 그때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주량이 됐다는 것뿐, 마치 대학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동이 틀 무렵, 끝까지 버티던 오선배가 오와 열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구잡이로 누워 잠을 청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술기운이 치솟았지만 견딜만했다. 그대로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방문을 나서다 말고 퍼질러 자는 그들을 힐끗 보았는데 티켓 없이도 감상할 수 있는 웅장한 코골이 오케스트라였다. 나만 보기 아까웠지만 천천히 돌아서서 단정하게 방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또 보자고.
 
오랜만에 입은 청바지와 외출 때 자주 신지 않는 스니커즈는 불편했지만 견딜만했다. 흰색 재킷과 검은 백팩 때문에 되려 발랄한 기분까지 들었다. 술기운과 허기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렇게 전날 오전에 멀쩡하게 집을 나서며 시작된 일정이 일요일 오전으로 치달았다. 고픈 배를 채워주지 않으니 좀처럼 술기운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차를 집에 두고 왔기에 풀풀 술내를 풍기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탄 후에도 두 차례나 환승을 해야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모란역에 도착했다. 서둘러 개찰구를 밀고 지하철 역사 로비로 나와 한숨을 돌린 후 출구로 나갔다.  
 
이놈의 버스는 오늘따라 왜 이리 안 오나...
 
버스를 한 번 더 타야만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 타고, 내리고, 갈아타고를 반복하는 게 지겨웠다. 이럴 시간이면 부산이라도 갈 수 있었겠다며 혀를 끌끌 차는데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에 젊은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나름 수줍은 모양새로 무언가를 내미는데 살펴보니 캔커피였다.
 
저기, 이거 한 잔 드세요.
무척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받아 든 캔커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밤샘 음주와 대중교통에 시달린 후라 앞뒤 가릴 것 없이 그저 갈증이 멈추기만을 바랐다. 왜 낯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캔커피를 건넸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도를 아세요'가 다음 대사로 나와도 괜찮았다. 캔커피를 마신 채 쓰러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망대해 새우잡이 어선 갑판 위라는 걸 깨닫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대로 조금이나마 갈증이 물러가자 아주 조금씩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괜히 민망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커피 잘 마셨어요.
오렌지 주스라도 하나 드실래요?
 
저는 괜찮아요.
 
웃으며 사양하는 그녀는 자리를 뜨지는 않은 채 여전히 한 발자국 근처에 서서 애매한 몸짓이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으니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멀리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기다리는 버스가 보였다. 옆면에 적힌 번호를 보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맞다.  
 
신세 지고 그냥 갈 수는 없으니
이거라도 받으세요.
 
자판기에서 뽑아 건넨 오렌지 주스, 그 걸 받아 든 그녀를 뒤로하고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재빠르게 올랐다. 출입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움직이는 버스 유리창 너머로 오렌지 주스를 들고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어쩐지 어색해서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잠이 들 때까지
줄곧 한 가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근데 모르는 사람이 캔커피는 왜 건넨 거지?
 
쪽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는 이미 기울어 일요일 저녁이다. 선후배들의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이라 전화를 걸어 보니 우이동에 남았던 이들은 모든 일정의 마무리 즈음에 있었다. 곧 뒤풀이를 하고 헤어질 예정이란다. 오선배에게 귀가 중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그들의 마지막 술자리에 내 이야기가 즐거운 술안주가 되길 바랐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전화가 빗발쳤다. '왜 그냥 온 거냐'는 탄식부터 '전화번호라도 알아왔어야지 이 멍청아'라는 조롱을 지나 후배들의 슬픔 어린 메시지도 많았다.
 
선배는 진짜 아이가 맞네. 돌아이.
 
가끔 생각이 난다.
내가 흔드는 손을 바라보고 서있던
버스 유리창 너머 오렌지 주스를 든 그 여자.
 
그날 내가 그녀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던 건,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모르겠다. 제니스와 제제를 만나게 해 주려는 큰 그림 말이다.
 
참 다행이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모든 일들은요.
제니스와 제제를 만나기 위해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결국 만나서 우리는 함께입니다.
결국 이럴 줄 알았다면 제니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냥 결혼할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제제는 지금 몇 살일까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매일 함께니까요.
제게서 지났던 모든 일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제가 겪었던 모든 희로애락이 모여 지금의 제 마음가짐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요.


하루 또 하루 열심히 살아야죠. 지금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만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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